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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 역사의 시작은 누구부터인가

이슬 (새벽이슬, 이슬의꿈,이슬과길) 2011. 3. 30. 13:24

  우리 역사의 시작은 누구부터인가

 

 

중국 역사서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것은 사마천이 지은 "사기"와
공자가 엮은 "춘추" 및 "상서"이다. 그 가운데 역사서로서 높이 평가받는 것은
"사기"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지으면서 가장 어려워한 주제는 중국 역사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느냐 하는 점이었다. 실제로 그는 "사기"의 첫 부분에서 그런 고민의
결론부터 밝히면서 '황제시대'를 중국 역사의 출발점으로 삼았고, 오늘날까지
중국 역사는 이 시기를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 이전 시대에 관해서는
이렇다 할 유적이나 문헌이 발견되지 않았고, 전해지는 사실 또한 믿을 수
없다고 보았던 탓이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점은 우리가 "사기"의 이 부분을 통해 잃어버린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게 된다는 사실이다.
  "사기"의 첫 부분인 "오제본기"의 첫 문단은 황제의 내력을 밝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소전'의 후예로서 성은
공손이고 이름은 헌원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황하 중상류의 한 갈래인
희수 근처에서 자랐기 때문에 뒷날 성을 희(제비라는 뜻)씨로 바꾸었다고
한다.
  황제의 내력을 밝힌 뒤 사마천의 붓끝은 황제가 황하 유역의 통치자가 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는데, 그 가운데 결정적인 사건은 탁록이란 벌판에서
벌어진 치우와의 전쟁에서 황제가 승리를 거둔 일이었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수십 번의 패배 끝에 외부세력("사기"에서는 신적인 힘으로
표현되고 있다)의 도움을 받아 겨우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황제뿐만 아니라 치우란 인물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주를 달아놓았는데,
"사기"에 붙어 있는 그 주들의 내용을 종합,정리해보면, 치우는 '하늘의
아들'이었으며, 풍백과 우사 등을 거느렸던 인물이다. 이것은 마치
"삼국유사"의 단군사화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내용이다. 심지어 공안국은
"치우란 구려(동아시아 기마종족의 옛이름)의 임금 이름이었다"고 단정짓기도
했다.
  그러면 뒷날까지 동아시아의 전쟁신으로 받들어진 치우가 활동했던
중심무대는 어디였을까? 치우의 무덤이 있는 위치를 안다면 그의 활동무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고대 군주들은 대부분 그
세력중심지에 묻히기 때문이다.
  "한서" '지리지'에 따르면 치우의 무덤은 산동성 동평군 수장현 관향성 안에
있는데, 높이가 7척으로 진나라와 한나라의 주민들은 매년 시월 상달에
그곳에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기록이 타당하다면 치우의 세력중심지는
산동성 근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치우는 과연 어떤 종족에 속하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사기"의 주에서 치우를 '하늘의 아들'이라고 기록한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여러 문헌을 살펴볼 때, 당시 '하늘의 후예'를 자처했던 것은 동아시아
기마종족만의 문화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구려'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원래 우리 겨레를 비롯하여 동아시아 기마종족을 표현하는 이름이며,
실제로 한나라 사람은 여러 기마종족의 연맹체였던 고구려를 곧잘 구려라고
불렀다.
  계연수가 엮은 "환단고기" 또한 치우를 단군시대 이전에 살았던 동아시아
기마종족의 군주로 기록하고 있다. 즉 '삼성기'에는 치우가 배달나라의 14대
환웅인 자오지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치우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겨레의 구전이나 설화 및 신화 등 이곳저곳에
상당히 많은 편이다. 심지어 그의 초상을 본뜬 귀신 얼굴은 오랫동안 일종의
액막이 부적처럼 기와에 새겨지기도 했다.
  그러면 치우는 과연 어느 시대의 인물이었을까?
  은허(은의 유적지)의 발굴로 유명한 둥쭤빈이 "갑골문단대연구례"에서 밝힌
연표에 따르면 황제인 공손헌원은 서기전 2692년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와 함께 전쟁을 벌였던 치우도 비슷한 시대의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환단고기"의 '삼성기'에서는 치우가 서기전 2707년에 환웅이
되었다고 하면서 구체적인 연도까지 밝히고 있다. 하지만 위서 시비에 휘말려
있는 "환단고기"의 내용을 온전히 믿을 수는 없고, 그것을 믿는 대신 다른
것을 의심할 따름이다.
  '이때 이미 그런 강력한 세력을 이루어 대륙의 패권을 다투었던 동아시아
기마종족들이 어떻게 그 뒤 4백여 년이 지나서야 겨우 가상의 신화적인
단군시대를 열었단 말인가?'
  의심 뒤의 결론은 명백하다. 황제와 마찬가지로 치우를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할 때, 왕검 이후 단군의 시대는 이미 치우의 시대보다 훨씬 발전된 문명을
누렸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치우가 도읍을 신시에서 청구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가리키는 바가 크다. 아울러 "환단고기"가 비록 구전 등을 정리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내용에 상당한 진실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누가 이겼든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공손헌원계와 지우계는 틀림없이 나누어졌을 것이고, 그 뒤
그들의 세력중심지는 새롭게 설정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치우계는 중국 동북부의 기마종족계로 남았고, 공손헌원계는 황하
중서부를 중심으로 세력권을 이루게 되었다. 공손헌원은 중국 북동부의
기마종족계에서 확인되는 고유한 성인 공손씨에서 다시 희씨로 성을
바꾸었다고 하는데, 희는 황하의 중서부와 관련된 지명으로 그곳이 바로 그의
근거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치우의 무덤이 산동성에 있다는 "한서" '지리지'의
기록은 치우의 근거지가 어디였는가를 말해준다. 물론 근래에 이루어진
고고학적 연구결과에 따르더라도 대략 그 시기부터 두 지역에서 발굴되는
유물은 한편 서로 닮았고, 한편 서로 다르다.
  본래 치우계나 공손선원계는 모두 기마종족 내부의 세력이었지만, 이들은
기마종족의 발전과정에서 일어난 주도권 경쟁으로 말미암아 자체분화를 하지
않았나 판단된다. 그러기에 이제부터 편의상 공손헌원계와 관련된 세력을
'중국계 기마종족'이라 부르고, 치우계와 관련된 세력을 '동아시아계
기마종족'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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