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은이: 박현
발행처: 두산 동아
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 21가지
(이끄는 글)
이 글을 써보라고 부탁받은 것도 벌써 한 해 전의 일이다. 그러나 글을
느리기만 했다. 글이 느린 만큼 많은 일을 겪었던 것도 사실이다. 먼저 고전을
다시 살펴보고 옛 시대의 몸공부를 정리하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고, 공부한
내용을 이곳저곳에서 강의하는 일도 빠뜨릴 수 없었다.
천 번도 넘게 읽었을 "대학"과 "중용"을 두어 곳에서 강의했으며,
"용호비결"과 같은 책도 수십 년의 짧은 경험과 천박한 알음알이로 다시
풀어가고 있었다. 틈틈이 이 나라의 잘 드러나지 않는 곳에 계시는 훌륭한
어른들도 몇 분 찾아뵈었다.
그러다 보니 염치없는 시간이 무심하게 흘러갔고, 이제야 글을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글에 대한 압박감은 더욱
무거워졌다. 출판사가 주는 보이지 않는 압박도 적지 않았지만, 더불어
공부하는 분들의 관심이 더욱 크게 압박했다. 일주일에 한두 번씩 만날 때마다
그분들은 "이제 그 글 다 쓰셨습니까?"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다.
'한반도가 작아지게 된 역사적 사건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 만약 이 주제가 우리 겨레의 축소된 영토만을 다루는 문제라면
나는 이 글을 쓰는 데 적임자가 될 수 없다. 이 방면의 전공자들이 즐비한데다
그 문제는 나의 관심을 그다지 끌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변변치 못한 책을 여러 권 썼다. 아마 그 책들 때문에 앞으로
많은 짐을 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글만큼 나에게 짐을 지운 경우는
없었다. 불교의 교과서 격인 "선가귀감"을 풀이하거나 확인하기 어려운 먼
시대의 지성사를 서술할 때도 이처럼 힘들지는 않았다.
한반도가 작아졌다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우리 역사가 작아진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뜻할까? 나는 이러한 의문들을 '사람됨의 사회적 크기와 그
사회의 역사는 무슨 관련을 가질까'하는 것으로 바꾸어보았다. 그리고 그런
관련성을 어떻게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 적지
않은 생각을 했다. 따라서 이 글의 주제는 지난 한 해 동안 나의 화두였으며,
나의 묵은 빚이었다.
이끄는 글을 쓰는 지금까지도 나는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아직도 그
화두를 다 풀지 못했으며, 묵은 빚도 시원스레 털어버리지 못한 탓이다.
지금 우리는 분명 작은 민족이다. 제 옷을 벗어버리고 제 음식을 내다버리며
제 말조차 뜻없이 쓰는 우리는 분명 작은 사람이다. 한배에서 난 형제끼리
철조망 너머에서 핏발을 세우고 멀거니 앉아 있는 우리는 분명 못난
사람들이다. 부모 형제조차 챙기지 못하면서 세계화를 이야기하고, 황폐한
정신은 가다듬지 못하면서 경제적 부만 찾으며, 멀쩡한 땅조차 죽임의 영토로
만들어가면서 독도를 이야기하는 우리는 참으로 서글픈 고행자들이다.
나무에서 숭늉을 찾고 산에서 물고기를 찾는 줄도 모르고, 이리 비틀 저리
덥석 과학시대의 쳇바퀴를 도는 날다람쥐들이다.
이 글을 오늘날의 작은 우리를 역사적으로 찾아보는 역사수필이며, 그 역사
속에서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을 설계해보는 조감도가 되고자 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도 뒤집어 해석해보았으며, 주목하지 않고 지나쳤던
일에도 큰 의미를 부여해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의를 기울였던 것은 우리 역사를 고생대의 화석마냥
사건과 사건이 축적된 무생물로 보지 않고, 인간의 몸처럼 하나의 순환체계를
가지고 있는 생명체로 보려 했다는 점이다. 각 사건 또는 각 시대별로 끊어서
역사를 연구하고 그렇게 연구된 결과를 기계적으로 결합시킨다면, 역사는 이미
죽은 것이다.
역사가들은 보통 하나의 사건 또는 하나의 시대를 유기체로 다루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전체 역사를 그렇게 보아왔던가? 나는
어설프게나마 총체적인 역사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생명체라는 관점에서 각
주제들을 연결시키려고 했다. 그러자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역사적
개념이 많이 달라졌다. 단일민족이라는 구호의 허구성도 보게 되었으며,
실학이 고려 르네상스의 부활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 글을 그런 측면에서
'역사에 생명심기' 가운데 걸음마 격이 될 것이다.
스물한 가지 주제 가운데는 독자들에게 낯익은 것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몇몇 주제는
독자들에게 낯설고 거북스런 느낌을 줄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독자들을
난해함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는 덫은 없을 것이다.
이제 염치없는 눈빛으로 감사의 말을 더듬거려야겠다. 사실 이 글은
출판사의 김현정 씨가 직접,간접으로 협박하지 않았으면 탈고하기가
어려웠던 글이다. 생명의 한 조각을 나누어 그분께 감사를 드리고 싶다. 만날
때마다 인사말로 압박을 했던 나의 도반들께도 묵은 감사를 드린다.
병자년 십이월
북한산 아래에서
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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