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나에게 “예수님을 믿습니까?”하고 물은 적이 있었다. 나는 “예수님과 나는 하나다.”고 대답했는데 내가 그렇게 대답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내가 “나는 이름을 한문으로 쓸 줄 안다.”고 자랑한다면 사람들은 나를 무식한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지금까지 이름을 한문으로 쓸 줄 모르다가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런 결과로 나타나게 될까?
그것은 음과 양이 쌍으로 존재하듯이 알음(유식)과 모름(무식)도 쌍의 어휘이기 때문이다. 또 도(道)가 10장이면 마(魔)도 10장이라는 말이 있듯이 극과 극이 쌍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알음을 강조할 수록 모름을 강조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알음을 아는 사람은 알음을 말하지도 않고 자랑하지도 않는다. 알음의 세계는 알면 알수록 모름이 많아지게 되어 입이 다물어지고 고개가 숙여지게 되어 고요하고 조용해지지 않을 수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믿음과 불신도 쌍의 어휘다. 믿음과 불신이 함께 커지기 때문에 믿음이 커질 수록 불신도 함께 커지게 되어 믿음의 세계는 커진 불신을 없애려고 더욱 크게 믿음을 외치지 않을 수 없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부모를 부모로 부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나는 부모라고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부모는 그냥 부모일 뿐이다.
태어나는 순간에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기억하려고 노력한 적도 없고, 유전자를 검사하여 확인하지도 않았지만 너무나 당연한 것이 부모다.
그런데도 부모를 “부모라고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부모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이 손톱만큼이라도 있기 때문이다.
또 자녀가 대학에 합격하면 부모가 학비를 대주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런데도 “부모가 학비를 대주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학비를 대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과 의구심이 있어서 그런 말과 생각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너무나 당연한 것은 믿음을 말하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불신을 강조하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믿음신앙을 강조하는데 믿음신앙은 행동신앙으로 가는 전단계일 뿐이다. 예수는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원수를 사랑하라.” “가난한 이웃을 위해 전토를 팔아서 도와라.” “겉옷을 가지려는 사람이 있으면 속옷까지 벗어 주어라” “맛타령 옷타령을 하지 말라.” “잔치를 배설할 때는 청첩장을 돌리지 말라”
이런 가르침은 모두 행동과 관계가 있는 것이지 믿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수를 믿는 것은 초보적인 단계로 행동신앙으로 가는 전단계일 뿐인 것이다.
예수가 인류에게 가르침을 준 것은 행동신앙을 하라는 것이지 믿음신앙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또 행동신앙도 사상신앙으로 가는 전단계일 뿐이다. 사상신앙은 예수의 정신과 일체가 되는 신앙으로 나와 예수가 하나가 되는 신앙, 작은 성자, 작은 예수가 되는 신앙이라는 것을 기독인은 모두 명심해야 할 것이다. |
's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천국에 살 수 있는 원리 (0) | 2011.04.07 |
---|---|
[스크랩] 양자물리학과 색즉시공 (0) | 2011.04.07 |
[스크랩] 지식과 지혜 그리고 이치와 철학에 관하여.... (0) | 2011.04.07 |
[스크랩] 뉴에이지 1~2 (0) | 2011.04.07 |
[스크랩] Arsen Barsamyan 앨범 My Piano 외 (0) | 2011.0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