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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외래사상과 사회의 운명

이슬 (새벽이슬, 이슬의꿈,이슬과길) 2011. 4. 1. 18:02

  외래사상과 사회의 운명

  고구려는 백제와 달리 외래사상에 전적으로 의존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백제와 운명을 같이했다. 고구려 역시 광개토왕이 영토를 넓힌 뒤 점차 왕권
강화에 눈을 돌렸고, 사상적으로는 불교와 도교 및 전통사상 사이를 오가는
줄타기로 세월을 보냈다. 그런 과정에서 고구려를 구성하던 여러 종족들과
왕족 사이에 틈바구니가 생겼으며, 이것이 국력을 약화시켰다.
  사상적 혼돈도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광개토왕 이전의 고구려 무덤은 주로
전통사상에 따라 고안되었는 데 비해 그 이후의 무덤에서는 사상적 혼돈이
자주 발견된다. 예컨대 같은 시기에 만든 무덤들에서조차 서로 다른 문화적
요소가 곧잘 나타난다. 사신도와 신단수를 고집한 무덤과 더불어 불교식
연꽃무늬와 보살상이 벽화와 천장을 장식한 무덤이 같은 시대에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고구려가 문화적 혼돈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상과 사상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음을 보여준다. 불교가 들어오자 어떤 세력은 전통사상을
버리고 불교를 신봉했으며, 다른 세력은 불교를 배척하기만 했다. 이러한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연개소문이 도교를 수입하기도 했지만, 도교도 결국 또
다른 갈등의 불씨만 지폈을 따름이다.
광개토왕 이후의 고구려 역사는 그런 갈등의 역사였으며, 이러한 갈등은
결국 나라의 힘을 약화시켰다. 이렇게 문화적 통합력이 작은 사회가 고조선의

부활을 이룬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유럽 문화의 주류는 그리스 문화와 게르만 문화와 기독교 문화의 융합체라고
할 수 있다. 유럽의 중세는 이런 세 가지 문화적 요소가 갈등과 통합을 겪은
시대였다. 그리고 르네상스는 이들 세 요소가 나름대로 융합되면서 '유럽
시대'를 열었던 계기였다. 그런데 만약 이 세 가지 요소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배척을 받았더라면 유럽의 운명이 과연 오늘날과 같았을까? 그리스 문화의
합리성과 게르만 문화의 진취성과 기독교 문명의 근본주의가 융합되지
않았다면 산업혁명이 가능했을 것이며, 백인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가 올
수 있었을까? 실제로 이들 문명의 통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동유럽은
서유럽과의 경쟁에서 도태되고 말았다.
  외래문화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거나 쉽게 숭배하는 것은 자신의 문화적
역량을 줄이게 된다. 외래문화를 무조건 배척한 사회도 유지되기 어려우며,
그것을 쉽게 숭배하고 자신의 전통문화를 저버린 사회도 유지되기 어렵다.
역사는 언제나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오로지
전통사상을 중심으로 외래사상을 융합시켜낸 사회뿐이었다.
  고구려가 외래사상을 둘러싸고 지나치게 대립,갈등했다면, 백제는
지나치게 외래사상에 의존하려고 했다. 그런데 삼국 가운데 가장 힘없던
신라의 경우는 달랐다. 신라는 외래사상(특히 불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받아들인 뒤에는 그것을 자신의 문화적 역량으로 녹여내는 데 가장
적극적이었다. 전통사상을 중심으로 불교와 유교를 받아들였고, 나아가 이
요소들을 주체적으로 융합시키려고 노력했다.
  "삼국사기"에 남아 있는 최치원의 문장 하나가 신라의 그러한 자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신의 도가 있는데 그 이름을 풍류라고 한다. 그 도의 연원은
선가의 사적에 잘 밝혀져 있으며, 사실상 세 가지 사상(유교와 불교와 도교)의
원리는 모두 포함하고 있다.

  이 기록을 남긴 최치원이 비록 남조신라 때 사람이긴 하지만, 그의 기록에서
삼국시대의 신라가 외래사상을 대했던 기본적인 자세를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역사적 사실들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신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풍류란 다른 모든 훌륭한 사상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상적 원리였으며, 그
어떠한 것보다 높은 차원의 사상적 원리로 간주되었다.
  신라는 불교를 받아들이는 데서도 이런 입장에 서 있었다. 그들은 처음에
불교와 심각하게 대립했지만, 마침내 그것을 전통문화 속으로 포섭해버렸다.
그러므로 신라에서는 불교와의 근본적인 대립이나 불교에 의한 자기 문화의
근본적 변질이라는 측면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원광법사와 같은 인물이 나타남으로써 마침내 불교가 신라의
전통적인 사상 속으로 포섭되었음을 보여주었다. 또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도 불교사상을 깊이 있고 독특하게 이해한 지성인들이 많았다는 것은
신라가 가지고 있던 전통사상의 수준을 짐작하게 해준다.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였으나 이렇듯 정신적으로 이미 강대국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만주벌판을 휩쓸었던 고구려 그리고 바닷길을 통해 중국의 모든 해안지역과
일본 열도에까지 담로를 설치했던 백제의 멸망은 근본적으로 그들의 문화적
허약함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 백두대간 끝머리에서 남한 땅의 절반도 안 되는
지역을 차지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눈치만 살피던 신라의 성장 역시 그들의
강력한 문화적 주체성 때문이었다.
  우리는 외래사상에 대한 자세에 따라 그 사회의 운명이 어떻게 결정되는지
삼국시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강성했던 두 나라의 그릇된
선택이 결국 불완전한 삼국통일을 낳았고, 나아가 영토적으로 작은 한반도가
만들어지는 최대의 계기가 되었음을 확인하면서, 숱한 외래사상을 만나
허덕이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 처지를 새삼 되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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