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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백제의 미륵불교

이슬 (새벽이슬, 이슬의꿈,이슬과길) 2011. 4. 1. 13:07

  백제의 미륵불교

 

  백제는 고구려와 같은 종족적 계보를 가진 나라였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와 상당히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가 북부여로부터 내려오는
기마종족 고유의 제사장적 전통을 거의 고스란히 물려받은 나라라면, 백제는
상대적으로 그런 전통의 굴레가 약한 나라였다.
  백제를 세운 온조나 고구려의 둘째 임금인 태조 유리는 모두 주몽의
배다른(어머니의 종족계보가 서로 다른) 아들이었지만, 그들의 정치적 성격은
상당히 달랐다. 유리는 북부여에서부터 주몽을 찾아와 권력을 이어받음으로써
북부여와의 졸본부여의 제사장적 전통을 모두 이어받아야 했던 반면, 온조는
그런 전통을 상당히 가볍게 여겼던 개척자였기 때문이다.
  온조와 열 명의 추종자들 및 그들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은 고구려와 다른
새로운 사회를 갈망했을 것이다. 그런 탓인지 백제에서는 전통사상과 불교
사이의 갈등이 훨씬 적었으며, 왕권 또한 고구려보다 상당히 강력했다.
  백제에도 고구려처럼 부족회의체가 있었다. 그러나 이 부족회의체도
고구려의 그것과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고구려의 경우 각 부족들은 왕의
부족과 거의 동등할 만큼 독립적이었으며, 부족들의 연맹에 의해서 나라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처음부터 하나의 부족이 세운 국가였으며,
그 부족이 영토를 넓히면서 부족의 수가 늘어나거나 초기 부족에 의해 정복된
부족이 생겨 그 수가 늘어났다. 그러므로 왕의 위치는 처음부터 고구려보다
상당히 안정적이었다.
  그러므로 백제 임금의 욕망은 권력독점이아니라 이미 독점하고 있는 권력을
더 강화하는 것이었다. 즉 백제에는 왕권의 강화를 확인하는 정도가 아니라
백성들을 대상으로 왕권의 절대성을 확보하는 이념이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런
필요성에서 백제의 왕족들이 관심을 기울인 종파는 바로 계율종을 표방한
미륵불교였다.
  기마종족 연맹체의 경우 왕권 강화는 여러 종족의 공존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았다. 왕권의 강화될수록 종족 사이의 평등은 파괴되게 마련이다. 따라서
왕권 강화보다 종족 사이의 합의와 공존을 존중하는 기마종족의 전통적 사상은
왕권 강화를 절대적으로 제약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삼국시대의 임금들은 왕권
강화를 위해 전통사상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늘의 대리인이기보다
정치경제적 강자이기를 원했다. 그들은 서서히 정치로부터 종교를 분리시키고,
나아가 종교를 정치에서 추방하고자 했다.
  그러나 백제의 임금들은 오히려 교정일치의 원칙을 더욱 강화해나갔다.
임금이 곧 하늘의 대리인이라는 등식을 임금이 곧 미륵부처라는 등식으로 바꾼
것을 제외하면 그들은 여전히 교정일치를 내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두 가지 등식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점이 있다. 하늘의 대리인이라는
것은 과거의 경험을 존중하는 입장으로서 과거의 전통을 소중하게 여기는
관점에 서 있지만, 임금이 곧 미륵부처라는 주장은 미륵의 미래지향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과거보다는 미래를 강조할 수 있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강조함으로써 백성들에 대한 통치력을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백제의 임금들은 임금이 곧 미륵부처라는 등식을 백성들에게 주입하기 위해
미륵불교를 널리 알리는 한편 그 권위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법왕이 왕흥사를
세우려고 한 것도 그 가운데 하나다. 왕흥사는 결국 법왕의 아들인 무왕 때
완성되는데, 무왕은 완공된 왕흥사를 아예 미륵사라고 불렀다. 그리고
틈틈이 미륵사로 행차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백제에서는 미륵신앙과 관련된
불교 사찰이 여러 곳에 세워졌다. 곰나루(웅진) 가까운 지역에 남아 있는
사찰들, 예컨대 금산사의 창건만 하더라도 백제시대로 거슬러올라간다. 더구나
곰나루가 백제의 제사장적 권위를 상징하는 곰강(오늘날의 금강으로 곰은 신의
겨레말이다)에 있었으므로, 임금이 곧 하늘의 대리인이고 미륵이라는 등식을
강조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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