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의 선각자, 기자
이런 중요한 시기를 상징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기자는 자신의 사상을
직접적으로 후대에 전달하지 못했다. 그가 얼마나 많은 기록을 남겼는지
모르지만, 오늘날의 우리는 그의 저작물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주나라
무왕에게 '홍범구주'를 가르쳤다는 기록만이 "상서"등에 남아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기자의 사상은 홍범구주의 내용을 가지고 알아낼 도리밖에 없다.
널리 알려진 대로 홍범은 오행이론의 문헌적 효시가 되는 사상이다. 물과
불과 나무와 쇠와 흙을 기본 요소로 하는 이 사상은 각 기본 요소들의
상호작용이란 관점에서 우주만물을 설명한다. 이 이론은 순수한
다원론이라기보다 다원적 일원론에 가까운데, 그것은 이 다섯 요소의
상호작용이라는 불가분의 총체적 덩어리가 곧 우주라고 보기 때문이다. 예컨대
손가락은 다섯이라도 결국 하나의 팔에 소속된 것이라는 입장이다.
홍범구주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감각기관도 다섯 요소를 본떠 '다섯 가지의
일'로 판단하는데, '외모와 말과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밖에도 홍범구주에는 오행을 기초로 하는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비 오고
맑고 따뜻하고 춥고 바람 부는' 다섯 가지 요소로서 하늘의 기운을 파악하는
'서징'도 바로 그런 것이다.
그 가운데 또 하나의 흥미로운 요소는 '세 가지 진리스러움'이라는 부분이다.
'정직과 강함과 부드러움'이 바로 그것인데, 이것은 상황에 따라 선택되는
덕목이다. 일의 종류에 따라 이런 덕목을 제대로 적용하지 못하면 재앙이
미치는 것으로 보는데, 이 재앙의 집행자는 바로 하늘이거나 하늘의
대리인이다.
이 부분은 기마종족 특유의 하늘사상을 계승하고 있다. 즉 거기에는 인간을
주체적인 행위자로 설정하고 하늘을 그 행위의 근거로 삼는 관점이 담겨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주체성이란 부분이 좀더 구체적으로 이론화된 점은
왕검시대의 신앙적 관점과 선명하게 구분되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기자의 사상은 왕검의 사상보다 훨씬 구체적,체계적으로 사물과 인간을
이해하기 시작함으로써, 신앙적 사상에서 과학적 사상으로 한걸음 다가섰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홍범의 사상은 단군계의 제사장적 전통을 보충할 수 있는
이론이었으며 아울러 제사장의 '신성한' 권위에 도전하는 '불순한' 이론이기도
했다.
인간의 지위를 설명하는 내용 가운데서, 홍범은 기존의 제사장적 권위를
상당히 축소시키고 인간들 사이의 합의를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시대를
요구하고 있었다. 홍범에 보이는 대동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대동이란
임금에게 큰 의문이 있을 경우, 먼저 자신의 마음에 물어보고 원로나
관리들에게 물어보며 백성에게도 물어보고 점치는 이에게도 물어보아 모두
좋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대동에서는 제사장적 기능이 벌써 임금과 점치는 사람으로 구분될
뿐 아니라, 원로 및 백성들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중요하게 거론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홍범의 대동사상은 제사장적 권위를 절대적으로 보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서로 일치하지 않을 경우, 왕이나 원로보다는 점치는 이의
견해가 중요하다고 했으므로, 제사장의 기능이 정치로부터 완전히 추방된 것은
아니었다.
홍범은 기자의 사상이 이미 신앙적인 권위로부터 상당히 벗어나 비신앙적인
사유체계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기자의 사상은 제사장의
신성한 권위에 따라 사회가 운영되던 고조선에 거대한 문화적 충격을 주었다.
기자의 사상이 제사장적 전통에 안주하던 고조선을 뒤흔드는 순간, 제사장적
전통과 기자(계)의 전통은 한편 갈등하고 다른 한편 타협,융합하는 오랜
과정을 밟아야 했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기마종족적인 또는 조선적인
문명'이 태동의 단계를 넘어 성장의 단계로 접어들게 되었다. 그런 면에서
기자는 겨레 역사의 '알'을 한걸음 키워낸 사상적 공헌자로 재부각되어야
마땅하다.
's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선과 교 (0) | 2011.03.30 |
---|---|
[스크랩] 우리 역사에 포함되어야 할 기본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0) | 2011.03.30 |
[스크랩] 기자는 한족계 지성인이 아니다 (0) | 2011.03.30 |
[스크랩] 기마종족과 혼혈 한족 (0) | 2011.03.30 |
[스크랩] 기마종족과 혼혈 한족 (0) | 2011.03.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