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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마종족과 혼혈 한족

이슬 (새벽이슬, 이슬의꿈,이슬과길) 2011. 3. 30. 13:40

    기마종족과 혼혈 한족

  기자가 역사에 등장할 당시 동아시아 사회는 어떠했을까? 한나라 때 유향이
편찬한 "설원"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가 죽은 뒤 많은 지식인들이 해설을 붙인
결과, 그 책은 일종의 백과전서적인 내용을 가지게 되었다. 바로 그 책에
우리가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이 몇 구절 실려 있다. 간략하게 그 내용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은나라 임금 탕이 하나라 임금 걸을 정벌하려 할 때, 이윤은 '정벌부터 하지
마시고 조공의 양을 줄여 반응을 살펴본 다음에 정벌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이윤의 말대로) 그렇게 하자 걸이 화가 나서 구이의 군사를 동원하므로,
이윤은 '아직 정벌할 때가 아닙니다. 저들이 아직 구이의 군사를 움직일 수
있으니 잘못하면 우리가 화를 입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탕은 걸에게
잘못을 아뢰고 다시 (종정과 같이)조공을 바쳤다.
  그러나 다음해에도 은나라가 다시 조공을 제대로 바치지 않자, 걸은 구이의
군사를 동원하려 했는데, 구이의 군사가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이윤은
하나라를 정벌하고자 주장했으며, 탕이 이윤의 주장을 따라 걸을 정벌하자,
걸은 남쪽으로 도망갔다.
  이런 내용은 "상서"나 "사기"에서도 확인되고 있는데, 이 기록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구이라고 부르는 세력의 군사력이 동아시아 정세를 가늠하는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점이다. 그런데 구이가 동아시아 기마종족들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들이 세운 연맹국가가 고조선임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따라서
은나라가 대륙의 패권을 노릴 무렵에 고조선은 이미 동아시아의 전체 판도를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강성함은
은나라가 대륙의 패권자가 된 다음에도 쉽게 변하지 않았다. 실제로 은나라는
고조선과 친선,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만 자신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은나라의 중심세력 그 자체도 기마종족의 한 계열이었다. 즉 이
시기까지 동아시아에서 중심적인 문명주도 세력은 어떤 측면에서 보더라도
기마종족이었다. 요컨대 은나라도 여전히 기마종족을 중심으로 하여 구성된
정치세력일 따름이었으며, 중국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독자적인 문명을 세우지는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한족의 입장에서 쓰여진 이 기록은 하족이나 은족 및
구이(고조선)가 모두 기마종족의 한 갈래이고, 그 가운데 은족과 하족이
세력싸움을 하고 있었으며, 이때 강력한 무력을 가진 구이가 은족과 손잡자
패배한 하족이 새로운 터전을 찾아 남하했음을 알려줄 따름이다.
  중국이 중국다운 독자적 문명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남쪽으로 도망갔던
하족의 후예들이 은 나라를 물리치고 주나라를 세운 뒤의 일이다. 즉
백이와 숙제 및 기자 등 은족의 망명인들이 황하의 중상류로부터 황하의 하류
및 요동과 요서 일대로 밀려난 뒤에야 비로소 '한족'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이다.
  '종족 내부투쟁'에서 밀려난 새로운 개척지를 찾아나섰던 하족은 일찍부터
남부(물론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살고 있던 토착 남방종족들과 완전한
혼거단계에 들어갔다. 바로 이 혼거,융합 과정을 통해 독특한
정치적,문화적 역량을 축적한 새로운 종족, 곧 혼혈 한족이 태어났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한 갈래인 서부의 주족이 다시 황하 중상류를 빼앗았으며,
다른 한족들을 통합하였다.
  따라서 주나라의 성립과 함께 등장한 혼혈 한족이 자신의 계보를 하나라에서
찾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자신들을 '여러 하족'이라고
불렀으며, 주나라 왕족은 자신의 성이 황제와 마찬가지로 희씨라고 주장했다.
그들을 문화적으로 훈련시킨 것은 하나라의 망명세력과 그 문화였으며, 그들의
그런 주장에는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혈연과 문명에서 절반만 하나라의 후예일 뿐이었다.
그들은 수백여 년에 걸쳐 이미 독자적인 문명을 이루어낸 새로운 종족, 곧
혼혈 한족(융합한족이라 불러도 좋다)으로 재탄생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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