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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 도둑맞은 역사와 기자

이슬 (새벽이슬, 이슬의꿈,이슬과길) 2011. 3. 30. 13:37

2. 도둑맞은 역사와 기자
  (기자증후군은 소중화, 사대주의에 눈먼 역사적 실수)

  기자를 내세우는 사람들과 배척하는 사람들

  잘 알려진 대로 기자는 은나라 말기의 지성인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
역사에서도 한동안은 왕검 이후 천년의 세월을 감당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었다. 그것이 과연 사실일까?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그런 평가는 대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의문을 풀어가기 위해 먼저 우리는 기자를
높이 평가한 중요한 문헌들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근조선(고조선과 구분하기 위해서 1392 년에 세워진 왕조를 근조선으로
부르기로 한다.) 중기의 당파정치에서 동인의 지도자였으며, 임진전쟁 때
재상을 맡기도 했던 윤두수는 "기자지"를 지었다. 또 '주기론'을 주장한
근조선의 이름난 성리학자 이이도 "기자실기"를 지었다.
  그밖에도 기자를 높이 평가한 옛 문헌은 상당히 많다. 직접적으로 기자를
다룬 문헌들 이외에도, 기자에 대한 이야기는 숱한 기록에서 나타나고 있다.
심지어 청주한씨와 행주기씨의 "세보"에서 41 대로 이어지는 기자조선의
계보를 기록하면서, 자신의 조상인 기자를 고조선의 정통 계승자로 설명하고
있다.
  관찬 역사서인 "고려사"에도 1102 년 10월 기자를 기리기 위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올리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 평양성 밖 기림리에
기자를 모시는 사당인 숭인전을 세웠다. 고려시대에는 그 사당에다
'유향전'이라는 이름으로 땅 50결에 대한 수조권(소작인으로부터 지대를
징수할 권리)을 주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숭인전의 책임자를 숭인감이라
부르면서 기자의 후손인 선우씨 일가에게 그 벼슬을 대물림하도록 해주었다.
뿐만 아니라 숭인전이 있는 자리가 기자의 묘터였다는 이야기를 마치 확실한
사실처럼 퍼뜨렸다.
  이처럼 기자에 대한 숱한 찬양기록과 여러 가지 숭배현상들이 근조선에
이르러 집중적으로 나타난 점과 그 배경을 확인한 뒤, 그것을 근조선의
'기자증후군'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 증후군은 주로 성리학자들에게서 발견되는데, 그렇다고 몇몇
성리학자들만의 특별한 증상은 아니었다. 중국에서 만든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근조선의 통치자들은 앞장서서 이런 증후군을
부채질했으며, 마침내 기자를 왕검의 유일한 정통 계승자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를 왕검보다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즉 기자가 한반도로 이주한
덕분에 '동방예의지국'이 되었다고 하면서, 근조선이 '소중화'임을 자랑했던
것이다.
  기자를 우상화하는 일은 성리학의 정치적 명분, 곧 중화사상과 관련되어
있었다. 겨레의 자주성을 부정하는 소중화 의식, 그 소중화 의식은 단순한
사대주의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혈연적 뿌리와 관련되어 있다는 자기 합리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근조선을 세우는 과정에서
사상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정도전이다. 그는 "경국대전"의 모태가 된
"조선경국전"을 지으면서 국호를 조선으로 정한 까닭이 '기자조선'의
계승자임을 밝히기 위해서라고 분명히 밝혔던 것이다.
  한편에서는 기자의 한반도 망명설을 부정하고 기자를 배척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들 또한 기자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하려고 했다.
나라가 위기를 맞이하여 겨레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을 때, 민족사학자들은
한결같이 기자를 거부했던 것이다. 예컨대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기자라는 인물의 존재 자체를 부정했다. 물론 그와 동시에 이 나라의 소중화적
정통성도 전면적으로 부정해버렸다.
  그렇다면 기자를 끌어들여 소중화의 구호를 합리화하려던 성리학자들의
이야기는 다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것일까? 그리고 기자를 겨레역사에서
몰아내어 민족의 자주성을 일깨우고 정통성을 바로 세우려던 민족사학자들의
주장은 모두 타당한 것일까? 이렇게 상반된 두 가지 주장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옳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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