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고의 경전 논학문(論學文) 보충번역
천도교 경전 중 ‘논학문’은 동학 초기에 동학론(東學論)의 제목으로 사용한 적이 있었으며, 현재 논학문(論學文)으로 되어있는데, 동학을 천도교로 이름을 바꾼 상태에서는 천도론(天道論)이라 해도 좋다는 생각을 먼저 밝히고, 한자어로 된 논학문 번역(해석)을 좀 더 구체적이고 알기 쉽게 보충번역(재해석)을 시도해본다. 물론 나의 공부차원에서 시작한다는 것도 아울러 밝힌다. 부족하지만 함께 공부하고 배움을 청하는 자세로 재번역을 해보겠다.
論學文 (논학문)
1. 夫天道者 如無形而有迹 地理者 如廣大而有方者也 故 天有九星 以應九州 地有八方 以應八卦而 有盈虛迭代之數 無動靜變易之理 陰陽相均 雖百千萬物 化出於其中 獨惟人 最靈者也
무릇 하늘의 도(道)란 것은 겉으로 들어나는 모양이 없는 것 같으나 그 이치에 의한 존재가 있고, 땅의 모습이란 것은 넓은 것 같으나 사방(四方)을 기준으로 하여 나타나는 위치가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늘에는 아홉별이 있어 땅의 아홉고을(작게는 나라, 크게는 세계를 아홉 고을로 나눔)과 응하였고 땅에는 여덟 방위가 있어 여덟 괘(卦)<역(易)을 구성하는 64괘의 기본이 되는 8개의 도형. 건(乾;)· 태(兌;)· 이(離;)· 진(震;)· 손(巽;)· 감(坎;)· 간(艮;)· 곤(坤;)>와 응하였으니, 차고 비고 서로 갈아드는 수는 있으나 움직이고 고요하고 변하고 바뀌는 이치는 없느니라.
음(陰)과 양(陽)이 서로 고루어(차이가 없이 비슷하거나 같게, 두루 빼놓지 않고) 비록 백 천 만물(숫자의 상징으로 수많은 것,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그 속에서 화해 나지만은 오직 사람이 가장 신령(귀신, 존엄, 총명, 하늘, 덕과 슬기를 갖춘 영적인 존재)한 것이니라.
2. 故 定三才之理 出五行之數 五行者何也 天爲五行之綱 地爲五行之質 人爲五行之氣 天地人三才之數 於斯可見矣
그러므로 삼재(三才)<음양설(陰陽說)에서 만물(萬物)을 제재(制裁)한다는 뜻으로,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이치를 정하고 오행(五行)인 우주간에 쉬지 않고 운행하는 다섯 가지의 원소(금金ㆍ목木ㆍ수水ㆍ화火ㆍ토土)의 수(數)를 내었으니 오행이란 무엇인가. 하늘은 오행의 벼리(중심과 역할의 줄, 사물을 총괄하여 규제하는 것)가 되고 땅은 오행의 바탕(뼈대나 틀을 이루는 부분, 사물이나 현상의 근본을 이루는 기초)이 되고 사람은 오행의 기운(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서, 만물이 나고 자라는 힘의 근원)이 되었으니, 천·지·인 삼재의 수를 여기에서 볼 수 있느니라.
3. 四時盛衰 風露霜雪 不失其時 不變其序 如露蒼生 莫知其端 或云 天主之恩 或云化工之迹 然而以恩言之 惟爲不見之事 以工言之 亦爲難狀之言 何者 於古及今 其中未必者也
봄여름 가을 겨울의 융성함과 쇠망, 바람과 이슬 서리와 눈이 그 때를 잃지 아니하고 그 차례를 바꾸지 아니하되, 아침이슬처럼 덧없는 세상 사람들은 그 까닭을 알지 못하여 어떤 이는 한울님의 은혜라 이르고 어떤 이는 자연의 이치에 따라 만물이 이루어진 것이라 하나, 그러나 은혜라고 할지라도 오직 보지 못한 일이요 만물을 내고 기르는 대자연의 이치라 말 할지라도 또한 형상(마음의 감각에 의하여 대상의 모습을 떠올리거나 표현함))하기 어려운 말이니라.
어찌하여 그런가. 옛적부터 지금까지 그 이치를 살피지 못한 것이니라.
4. 夫庚申之年 建巳之月 天下紛亂 民心淆薄 莫知所向之地 又有怪違之說 崩騰于世間 西洋之人 道成立德 及其造化 無事不成 功鬪干戈 無人在前 中國燒滅 豈可無脣亡之患耶 都緣無他 斯人 道稱西道 學稱天主 敎則聖敎 此非知天時而 受天命耶
경신년(포덕 원년, 1860년) 사월에 세상이 분란하고 민심이 효박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할 즈음에 또한 괴상하고 어긋나는 말이 있어 세간에 떠들썩하되, 「서양 사람들은 도를 이루고 덕을 세워다 하여 그 조화(造化)에 미치어 일을 이루지 못함이 없고 무기로서 침공함에 당할 사람이 없다하니 중국이 소멸하면 어찌 가히, 순망지환(입술을 잃으면 이가 시리다는 뜻으로, 가까운 사이의 한쪽이 망하면 다른 한쪽도 그 영향(影響)을 받아 온전(穩全)하기 어려움을 비유(比喩)하여 이르는 말로서 중국의 위험에 조선(한국)도 위험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의미)이 없겠는가. 」
「도무지 다른 연고가 아니라, 이 사람들은 도를 서도(西道)라 하고 학을 천주학(天主學)이라 하고 교는 성교(聖敎)라 하니, 이것이 천시(天時)<하늘의 도움이 있는 시기, 때에 따라서 돌아가는 자연의 현상>를 알고 천명(天命)을 받은 것이 아니겠는가. 」
5. 擧此一一不已故 吾亦悚然 只有恨生晩之際 身多戰寒 外有接靈之氣 內有降話之敎 視之不見 聽之不聞 心尙怪訝 修心正氣而問曰 何爲若然也
이를 일일이 들어 말할 수 없으므로 내 또한 두렵게 여겨 다만 늦게 태어난 것을 한탄할 즈음에, 몸이 많이 떨리는 듯 밖으로 신령과 접(이어지는)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말씀이 내려지는 가르침이 있으되, 보였는데 보이지 아니하고 들렸는데 들리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오히려 이상해져서 수심정기(마음을 닦아 기운을 바르게 함)하고 묻기를「어찌하여 이렇습니까.」
6. 曰吾心卽汝心也 人何知之 知天地而無知鬼神 鬼神者吾也 及汝無窮無窮之道 修而煉 之 制其文敎人 正其法布德則 令汝長生 昭然于天下矣
대답하시기를「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천지는 알아도 귀신(鬼神)은 모르니 천지의 큰 귀신이라는 것도 나니라. 너는 무궁(공간이나 시간 따위가 끝이 없음) 무궁한 도에 이르렀으니 닦고 단련하여 그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長生)<장생불사(長生不死)의 준말, 육신(肉身)의 장수(長壽), 영혼(靈魂)의 불멸(不滅), 사업(事業)의 유전(遺傳)을 합(合)하여 이룸>하여 온 누리에 빛나게 하리라.」
7. 吾亦幾至一歲 修而度之則 亦不無自然之理 故 一以作呪文 一以作降靈之法 一以作不 忘之詞 次第道法 猶爲二十一字而已
내 또한 거의 한 해를 닦고 헤아려 본즉, 또한 자연한 이치가 없지 아니하므로 한 편으로 주문(呪文)을 짓고 한편으로 강령(降靈)의 법을 짓고 한편은 잊지 않는 글을 지으니, 절차 와 도법이 오직 이십일 자로 될 따름이니라.
8. 轉至辛酉 四方賢士 進我而問曰 今天靈降臨先生 何爲其然也 曰受其無往不復之理 曰然則何道以名之 曰天道也 曰與洋道無異者乎 曰洋學如斯而有異 如呪而無實 然而運則一 也 道則同也 理則非也
신유년(포덕2년, 1861년)에 이르러 사방에서 어진 선비들이 나에게 와서 묻기를「지금 천령이 선생님께 강림하였다 하니 어찌된 일입니까.」
대답하기를「가고 돌아오지 아니함이 없는 이치를 받은 것이니라.」
묻기를「그러면 무슨 도(道)라고 이름 합니까.」
대답하기를「천도(天道)이니라.」
묻기를「양도(서양의 도)와 다른 것이 없습니까.」
대답하기를「양학은 우리 도와 같은듯하나 다름이 있고 비는 것 같으나 실지가 없느니라. 그러나 운(運)인 즉 하나요 도(道)인 즉 같으나 이치인 즉 아니니라.」
9. 曰何爲其然也 曰吾道無爲而化矣 守其心正其氣 率其性受其敎 化出於自然之中也 西人 言無次第 頓無爲天主之端 只祝自爲身之謀 身無氣化之神 學無天主之敎 有形無迹 如思無呪 道近虛無 學非天主 豈可謂無異者乎
묻기를「어찌하여 그렇게 됩니까.」
대답하기를「우리 도는 무위이화(無爲而化)라. 그 마음을 지키고 그 기운을 바르게 하고 한울님 성품을 거느리고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으면, 자연한 가운데 화해나는 것이요, 서양 사람은 말에 차례가 없고 글에 순서가 없으며 도무지 한울님을 위하는 단서가 없고 다만 제 몸만을 위하여 빌 따름이라. 몸에는 기운이 화하는 신령이 없고 학에는 한울님의 가르침이 없으니 형식은 있으나 자취가 없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주문이 없는지라, 도는 허무한데 가깝고 학은 한울님 위하는 것이 아니니, 어찌 다름이 없다고 하겠는가.」
10. 曰同道言之則 名其西學也 曰不然 吾亦生於東 受於東 道雖天道 學則東學 況地分東西 西何謂東 東何謂西 孔子生於魯 風於鄒 鄒魯之風 傳遺於斯世 吾道受於斯布於斯 豈可謂以西名之者乎
묻기를「도가 같다고 말하면 서학이라고 이름 합니까.」
대답하기를「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또한 동(東)에서 나서 동에서 받았으니 도는 비록 천도(天道)나 학인 즉 동학(東學)이라. 하물며 땅이 동서로 나뉘었으니 서를 어찌 동이라 이르며 동을 어찌 서(西)라고 이르겠는가.
공자는 노나라에 나시어 추나라에 도를 폈기 때문에 추로의 풍화가 이 세상에 전해 온 것이거늘 우리 도는 이 땅에서 받아 이 땅에서 폈으니 어찌 가히 서라고 이름 하겠는가.」
11. 曰呪文之意何也 曰 至爲天主之字故 以呪言之 今文有古文有
묻기를「주문의 뜻은 무엇입니까.」
대답하시기를「지극히 한울님을 위하는 글이므로 주문(呪文)이라 이르는 것이니, 지금 글 에도 있고 옛 글에도 있느니라.」
12. 曰降靈之文 何爲其然也 曰至者 極焉之爲至 氣者虛靈蒼蒼 無事不涉 無事不命 然而如形而難狀 如聞而難見 是亦渾元之一氣也 今至者 於斯入道 知其氣接者也 願爲者 請祝 之意也 大降者 氣化之願也
묻기를「강령의 글은 어찌하여 그렇게 됩니까.」
대답하기를
「지」라는 것은 지극(至極)한 것이요
「기」라는 것은 허령(虛靈)<포착(捕捉)할 수는 없으나 그 영험이 불가사의(不可思議)함>이 창창(蒼蒼)<푸르다는 의미를 상징하여, 드넓고 끝없이 이어지는 생명의 이치와 현상을 말하고자 함>하여 일에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고 일에 명령하지 아니 함이 없으나, 그러나 모양이 있는 것 같으나 형상하기 어렵고 들리는듯하나 보기는 어려우니, 이것은 또한 혼원(渾元)의 한 기운이요
「금지」라는 것은 도에 들어 처음으로 지기(至氣)에 접함을 안다는 것이요
「원위」라는 것은 청하여 비는 뜻이요
「대강」이라는 것은 기화(氣化)<인간의 기운이 천지의 기운으로 화하여 바뀜)을 원하는 것이니라.
13.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不移者也 主者 稱其尊而與父母同事者也 造化者 無爲而化也 定者 合其德定其心也 永世者 人之平生也 不忘者 存想之意也 萬事者 數之多也 知者 知其道而受其知也故 明明其德 念念不忘則 至化至氣 至於至聖
「시」라는 것은 안에 신령(神靈)이 있고 밖에 기화(氣化)가 있어 온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않는 것이요
「주」라는 것은 존칭해서 부모와 더불어 같이 섬긴다는 것이요
「조화」라는 것은 무위이화요
「정」이라는 것은 그 덕에 합하고 그 마음을 정한다는 것이요
「영세」라는 것은 사람의 평생이요
「불망」이라는 것은 생각을 보존한다는 뜻이요
「만사」라는 것은 수가 많은 것이요
「지」라는 것은 그 도를 알아서 그 지혜를 받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그 덕을 밝고 밝게 하여 늘 생각하며 잊지 아니하면 지극히 지기에 화하여 지극한 성인(聖人)<사리(事理)에 통달(通達)하고 덕과 지혜(智慧)가 뛰어나 길이길이 우러러 받들어지고 만인(萬人)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을 일컫는 말, 지극한 성인은 동학의 이치와 천도의 수련에 의해 누구라도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새로운 성인관>에 이르느니라.
14. 曰天心卽人心則 何有善惡也 曰命其人 貴賤之殊 定其人 苦樂之理 然而君子之德 氣有正而心有定故 與天地合其德 小人之德 氣不正而心有移 故 與天地違其命 此非盛衰之理耶
묻기를「한울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이라면 어찌하여 선악이 있습니까.」
대답하기를「귀하고 천한사람의 다름을 명하고 그 사람의 괴로움과 즐거움의 이치를 정했으나, 그러나 군자(君子)의 덕은 기운이 바르고 마음이 정해져 있으므로 천지와 더불어 그 덕에 합하고 소인의 덕은 기운이 바르지 못하고 마음이 옮기므로 천지(天地)와 더불어 그 명에 어기나니, 이것이 성쇠(盛衰)의 이치가 아니겠는가.」
15. 曰一世之人 何不敬天主也 曰臨死號天 人之常情而命乃在天 天生萬民 古之聖人之所謂而 尙今彌留 然而 似然非然之間 未知詳然之故也
묻기를「온 세상 사람이 어찌하여 한울님을 공경치 아니합니까.」
대답하기를「죽음에 임하여 한울님을 부르는 것은 사람의 상정이라. 목숨이 한울에 있음과 한울이 만민(萬民)을 내었다는 것은 옛 성인의 하신 말씀으로서 지금까지 미루어 오 는 것이나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 같기도 하여 자세한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16. 曰毁道者何也 曰猶或可也 曰何以可也 曰吾道今不聞古不聞之事 今不比古不比之法也 修者如虛而有實 聞者如實而有虛也
묻기를「도를 훼방하는 자는 어째서입니까.」
대답하기를「혹 그럴 수도 있느니라.」
묻기를「어찌하여 그렇습니까.」
대답하기를「우리 도는 지금도 듣지 못하고 옛적에도 듣지 못하던 일이요, 지금도 비교하지 못하고 옛적에도 비교하지 못하는 법이라. 닦는 사람은 헛된 것 같지만 실지가 있고, 듣기만 하는 사람은 실지가 있는 것 같지만 헛된 것이니라.」
17. 曰反道而歸者何也 曰斯人者不足擧論也 曰胡不擧論也 曰敬而遠之 曰前何心而後何 心 也 曰草上之風也 曰然則 何以降靈也 曰不擇善惡也 曰無害無德耶 曰堯舜之世 民皆 爲堯舜 斯世之運 與世同歸 有害有德 在於天主 不在於我也 一一究心則 害及其身 未詳知之 然而斯人享福 不可使聞於他人 非君之所問也 非我之所關也
묻기를「도를 배반하고 돌아가는 자는 어째서입니까.」
대답하기를 이런 사람은 족히 거론하지 않느니라.」
묻기를「어찌하여 거론하지 않습니까.」
대답하기를「공경 하되 멀리할 것이니라.」
묻기를「입도할 때 마음은 무슨 마음이었으며 도를 배반할 때의 마음은 무슨 마음입니까.」
대답하기를「바람 앞의 풀과 같은 것이니라.」
묻기를「그렇다면 어찌 강령이 됩니까?」
대답하기를「한울님은 선악(善惡)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 니라.」
묻기를「해도 없고 덕도 없습니까.」
대답하기를「요순의 세상에는 백성이 다 요순같이 되었고 이 세상 운수는 세상과 같이 돌아가는지라 해가 되고 덕이 되는 것 은 한울님께 있는 것이요 나에게 있지 아니하니라. 낱낱이 마음속에 헤아려 본즉 해가 그 몸에 미칠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런 사람이 복을 누리리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듣게 해서는 안 되니, 그대가 물을 바도 아니요 내가 관여할 바도 아니니라.」
18. 嗚呼噫噫 諸君之問道 何若是明明也 雖我拙文 未及於精義正宗 然而矯其人 修其身 養其才 正其心 豈可有岐貳之端乎 凡天地無窮之數 道之無極之理 皆載此書 惟我諸君 敬受此書 以助聖德 於我比之則 怳若 甘受和白受采 吾今樂道 不勝欽歎故 論而言之 諭而 示之 明而察之 不失玄機
아! 참으로 감탄할 일이로다. 그대들의 도를 물음이 어찌 이같이 밝고 밝은가. 비록 나의 서투른 글이 정밀한 뜻과 바른 종지(宗旨)에 미치지 못했을지라도, 그 사람을 바르게 하고 그 몸을 닦고 그 재주를 기르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함에 어찌 두 갈래 길이 있겠는가.
무릇 천지의 무궁한 수와 도의 무극(無極)<끝이 없음. 동양철학에서 우주의 본체인 태극의 맨 처음 상태를 이르는 말, 스스로 다시 더할 것이 없기 때문에 다할 바가 없는 것이요 능히 다할 바가 없기 때문에 다시 더할 바가 없는 것이 된다.>한 이치가 다 이 글에 실려 있으니, 오직 그대들은 공경히 이 글을 받으라. 성스러운 덕을 돕기를 내게 비하면 황연히 단 것이 화청 을 받고 흰 것이 채색을 받는 것 같으리니 내 지금 도를 즐거워하여 흠모하고 감탄함 을 이기지 못하므로 논하여 말하고 효유하여 보이니 밝게 살피어 깊고 묘한 이치를 잃지 말지어다.
* 논학문을 보충 번역(설명)을 조심스럽게 하고 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천도교인이나 학자 일반연구가들이 흔한 말로, ‘수운 시천주, 해월 사인여천, 의암 인내천’등 으로 동학의 신앙과 사상의 변천과정을 말씀한다.
그런데 본 해석에서 수운 대신사님의 글을 자세히 살펴보자.
‘인내천, 사인여천’은 물론 ‘인오동포, 물오동포’를 포함하여 ‘해월, 의암, 춘암’ 스승님의 법설을 함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또한 유학의 경전 중에 하나인 주역(周易)에 의한 경(經)의 말씀은 조금도 흐트러짐 없이 순서에 의해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또한 유불선(儒彿仙)의 합일이요, 기독교 민간신앙 등 모든 종교와 사상의 장점을 취합했다는 어설픈 주장들은 본 ‘논학문, 동학론’을 세 번 정도만 탐독하더라도 그런 일들은 없을 것이다.
수운 대신사께서는 자신의 득도 전후를 망라하여 무극대도의 진리를 전해주시고 가르치시고 깨우치시기 위해 다른 종교와 사상을 글로서 인용하신 것이다.
그 명백한 증거가 논학문 속에 나오니, 아직 그러한 사살을 모르는 분들은 서투른 저의 글이지만 눈을 크게 뜨시고 찾아보시기 바란다.
끝으로 존경하는 선배님 한 분이 항상 ‘논학문’ 말씀마다 ‘인류 최고의 경전’이라 하시기에 나도 해보았는데, 틀림없는 사실이다.
감사합니다.
도암심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