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변화의 혼란속에서 - 선과 악
선과 악은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제일 모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선은 일반적으로 좋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악은 나쁘다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이런 2분법적인 분류 기준은 모든 영역으로 확대되어 부작용을 낳기도 합니다.
종교주의로 지배되었던 중세 유럽의 경우 사회 전반의 모든 기준을 선과 악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로 인한 부작용은 우리가 이미 역사를 통해 배웠습니다.
자유주의가 확산되면서 이런 2분법적 사고는 힘을 잃게 되었고, 다양화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전에 학교에서 절대론적 윤리와 상대론적 윤리에 대해 배웠습니다.
시대와 상관없이 항상 일정한 선악 기준을 절대론적 윤리라 하고, 때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선악 기준을 상대론적 윤리라 합니다.
우리는 매우 쉽게 선과 악을 생각하지만, 실제로 판단의 영역에 들어서면 이를 분별하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선, 선과 악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선은 좋다고 악은 나쁘다입니다.
주체는 무엇일까요?
누가 무엇을 좋다/나쁘다로 구분하는 것인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무엇이 좋은가 나쁜가를 구분하지만, 누가라는 것에 관심을 가진 경우는 없습니다.
선악 기준은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절대론적 윤리는 변하지 않는 신을 누구로 본 것이고, 상대론적 윤리는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을 누구로 본 것입니다.
항상 나를 주체로 생각하는 선악 기준으로 인해 다른 사람과 의견 충돌이 생기고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양심이라 부르는 신을 주체로 한 선악 기준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을 조종하는 세력은 이것을 이용해서 교묘하게 자신들의 기준을 신의 기준인것 처럼 끼워넣습니다.
나에게 선은 무엇일까요?
내가 하기 좋은 것, 쉬운 것 등이 선이 됩니다.
나에게 배우자로써 미녀/미남은 선이 되고, 추녀/추남은 악이 되겠지요. ^^
나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은 선이 되고, 손해를 주는 사람은 악이 됩니다.
이처럼 선악 기준을 자기에게 두면 선하다 악하다라는 평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평가를 위한 기준은 존재합니다.
시험 문제를 풀 때, 자기식대로 푸는 사람이 좋은 점수를 못 받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범인과 성인의 차이는 선악 기준을 자기에게 두느냐 신에 두느냐로 생깁니다.
여기까지는 사실 조금 깨달았다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이지요
좋은 평가를 받으려면 신의 선악 기준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도대체 한번도 만나보지도 못한 그 신의 기준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다행히 역사를 보면 신이 인간들에게 그 기준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계명입니다.
그 계명이 법의 근간이 되고, 사회를 유지시키는 윤리의 시작입니다.
사실, 신이 준 계명은 인간 사회를 혼란 없이 최소한으로 유지시키기 위한 테두리일 뿐이었습니다.
유토피아 건설은 그것만으로는 많이 부족합니다.
인간의 지배 세력은 신의 피를 가진자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항상 효과적인 지배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 계명에 슬그머니 자신들의 기준을 끼워 넣었습니다.
사람들은 신의 권위 앞에서 계명을 지켜야 했고, 동시에 지배 세력도 떠 받들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지키도록 강요받는 지금의 계명 속에는 신의 것과 지배 세력의 것이 섞여 있습니다.
단순히 계명의 지킴으로 신에게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커다란 착각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배 세력의 계명이 신의 계명을 어기는 상황도 만들어내니 이는 선악 기준의 거대한 혼란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의로운 자가 없나니라는 말이 신의 입에서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옳고 그름을 구분할 수 없고, 배워서 아는 것만 가능한... 즉, 지능만 가진 인간들은 이 상황을 헤어나올 수 없습니다.
신은 계명만으로 인간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계명은 더렵혀졌으며, 지배 수단으로 활용되었습니다.
아무리 깨끗이 닦아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더렵혀질 수 밖에 없는 것이 법과 규범입니다.
계명은 파기하기로 신은 마음 먹었습니다.
성서에 예수가 성전을 허무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로 이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선과 악의 기준으로 인간을 구분하지 않겠다는 것이 신의 입장입니다.
지배 세력은 이를 막기 위해 자신들의 계명을 견고히 하였지만, 결국 허물어졌습니다.
자유주의는 바로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고, 계명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스러운 모든 행동이 허용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선과 악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엄연히 존재하며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유토피아는 신의 뜻이 완성된 세계를 상징하고, 인간은 그 속에서 살기를 염원합니다.
유토피아의 통치는 신이 아닌 인간에 의해 이루어지기에 그 속에 사는 사람은 반드시 선과 악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이 신의 마음을 갖고 모든 현상을 판단해야만 인간들에 의한 유토피아가 완성됩니다.
자유주의에 의해 세상은 더욱더 혼란속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아무도 선과 악을 결정지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아직도 종교는 계명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저는 감히 말하지만, 종교에 갇힌 사람은 이 혼란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종교는 신의 메시지이고, 그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듣지 못한 사람에게는 이 혼란이 소멸로 끝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신은 인간의 참된 모습을 보기 원했습니다.
참된 모습은 여러가지로 알려져 있지만, 핵심에는 조화와 균형이 있습니다.
조화와 균형은 어떤 상황에서도 선을 향해 갈 수 있는 균형 감각을 의미합니다.
누구나 떠들어대는 사랑은 조화와 균형이 발휘되는 현상일 뿐입니다.
듣기 좋은 사랑이라는 말로 인해 남녀간의 사랑이 마치 인간의 참된 모습인냥 보여지고 있습니다.
주변을 보십시오.
조화와 균형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있는지를...
자기가 아는 것에 근거한 판단은 반드시 편중을 만들게 되고, 균형이 깨지게 됩니다.
균형이 깨진 인간 세상은 자연의 법칙 즉, 힘의 논리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돈이 세상의 중심에 선 것은 바로 사람들의 균형 감각의 상실로 인한 것입니다.
아무도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지 못합니다.
성서의 깨어있으라는 기도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균형을 잡으라는 것이고, 회개하라는 것은 이를 알지 못해서 악을 행했던 것을 뉘우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는 자신들의 세력을 견고히하기 위해 이것을 이용했습니다.
선을 느껴야 합니다.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니라 원래 그렇게 되어야 함을 아는 것이 바로 선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선을 위해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누구를 도와주는 등의 행위가 선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할 수도 있고, 못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습니다.
균형을 잡기 위해 판단하는 당신의 모습이 바로 선의 참 모습이 됩니다.
선을 아는 것은 우리 안에 신의 피가 흐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민족의 선조는 단군이지요.
단군은 신의 아들입니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신의 피가 몸 속에 흐르고 있을 것입니다.
제 글에서는 신을 매우 좋은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하지만, 모든 신이 그러한 것은 아닙니다.
선한 신과 악한 신이 존재합니다.
이 기준은 인간입니다.
인간에게 유리한 신이 선하며, 불리한 신이 악합니다.
제가 말하는 유토피아는 선한 신이 건설하려 하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 보여지는 세계 정부는 악한 신이 건설하려는 것이지요.
다음 글에서는 이 신들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