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4] `근원`과 나 - 그리고 진동! (깨달음, 자각)
깨달음을 찾아서!
지난주, KBS에서 백담사 수행승들에 대한 다큐를 방영했습니다. 40대가 넘는 출가승들이 많더군요. 그들이 그길을 택하기 까지는 많은 갈등과 단호한 결단을 요구했을 겁니다. 참 가슴이 찡했고 진정한 삶을 찾아 가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출가'란 솔직히 말해서 사치스러운 것이기도 합니다. '살아 간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전쟁을 치루는 것과도 같습니다. '출가'는 이 지겨운 세상으로 부터의 탈출이기도 한것 입니다.
출가승들에 대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시스템에 의한 훈련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새벽 5시에는 이미 일어나서 주어진 일을 해 나간다는 자체가 수행이기도 한 것입니다. 수행자들은 그런 극기를 요구하는 시스템 속에서 자기의 기초를 만들어 내야만 합니다. 그 끝은 '깨달음'을 얻는 것입니다. 다큐를 매우 감명있게 보면서 그들중에 몇명이나 '깨달음'에 도달할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런 수행 체계가 '깨달음'을 얻는데 진정한 도음을 줄것인지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193375
기독교에서도 이런 수행을 위한 조직과 체계가 존재합니다. '수도원'으로 알려진 수행을 하는 조직은 매우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수도원은 나름대로의 규율과 내적 영성훈련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세에 유명했던 '템플기사단'도 이런 수도승들의 조직체 였습니다.
깨달음의 실체에 대해서!
오늘날, 진정한 '각자(覺者)'는 청산이나 수도원에서는 나오지 못할 겁니다. KBS 다큐를 보면서 느낀 것은, 그들의 수행법은 이미 너무나 시스템화해 버려서 오히려 '깨달음'을 방해할 수 있을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깨달음'은 극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청산에서의 수행은, 표면적으론 매우 극기를 요구하는 상황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매우 안정된 삶속에서 주어진 것이며, 그것이 결국 내적인 안정감을 불러와 '깨달음'을 궁극적으로 방해하게 됩니다.
'깨달음'을 얻은 선사들의 이야기에서 공통점이 하나 발견되는데, 그들이 깨달음의 정체에 대한 깜깜한 벽에 부딪혀 극한상황에 도달했을 때, 홀연히 '깨달음'을 얻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수행자로서 변변한 거처나 자리를 보전받지 못한 상태의 가장 비천한 위치에 있었을 때, 그렇게 '깨달음'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은 서양의 정신적 지류를 형성한 사람들에게서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어떻게 오는가!
석가는, 괴로움('고'- 苦)의 끝에서 해탈했습니다. 해탈전, 마지막에 시험을 받았습니다.
예수는,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며 고행한 후에, '메시아'가 됐고, 또한 마지막에 3가지 시험을 받았습니다.
고통속에 수행했던 석가모니 부처님 예수께서 40일간 수행한 광야의 전경
가장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아무런 곳에도 돌파구가 보이지 않을 때, 내면을 향한 의지와 '고(苦)'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상황에서의 갈등이 최대한 증폭될 찰나, 그때 '깨달음'이 나타납니다. 그로인해 커다란 의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그런 상황은 결국 우주적인 연출에 불과한 것임을 자각하게 됩니다.
물론 이것은 대각(大覺)이 아닌 작은 '자각'일 수 있습니다. 이런 자각은 일상의 매우 작은 것에서 계속해서 일어납니다. 아침에 출근길에 바라본 사람들 모습에서 갑자기 신들의 모습을 보게되고, 세속에 세워진 지저분한 건물들과 시끄러운 차량들이 어느새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신들의 도시로 바뀌는 것입니다.
등산길에 마주친 작은 들풀에서 생명의 장엄함에 가슴이 뜨겁게 불타오름을 느끼게 되고, 엘리베이터 안에 마주한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인간'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날, 내게 가장 악귀처럼 느껴졌고 두려움을 주었던 사람을 통해, '극복'이란 황홀한 체험을 할 수도 있습니다. 피하지 않고 돌파함으로서 얻어지는 귀중한 결과를 미리 체험하는것 입니다.
자각을 유지하는 것!
매일을 살아 간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겐, 힘겨운 짐을 지고가는 고행과도 같은 것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지나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어디를 둘러 보아도 오아시스는 없습니다. 아무리 '뜻밖의 자각'을 체험할지라도 매일의 일상은 우리를 또 다시 힘겨운 세상으로 내 팽개치는것입니다. 나를 부양할 사람도 없습니다. '나'는 오로지 스스로 살아가야 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살아가며 자각을 얻는것은 체험을 우주와 공유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매일매일 '나'를 시험하고 '나'는 매일같이 그 시험에 지고, 또 '나'는 새로운 체험을 통해 자각을 얻고, 그리곤 다시 세상의 시험에 지는 반복을 합니다. 그러나 매일의 삶을 존중하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것을 '깨어서 살피는 것'을 계속하면, 어느새 그런것 또한 매우 자연스런 것임을 자각합니다. 자기에게 오는 어떤것 - 그것이 즐거움이든 어려움이든 - 이든 받아들이면 그것이 바로 우주적 삶의 체험임을 알게 됩니다.
지구의 삶은 그 자체가 귀중한 체험이고 이 체험의 장에서 도망가지 말아야 진정한 삶의 의미를 자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작은 것이던 큰 것이던 관계없이 귀중한 체험으로 간주하면 삶 자체가 소중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세상에서 매일을 살아가며 얻는 자각이 그래서 더욱 값진 것입니다. '근원과의 합일'은 청산이나 수도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그들만의 전유물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 글은 불교의 깨달음을 시비하기 위해서 쓰여진 글이 아닙니다.
이 글을 읽고 불쾌감이 들은 불자님께는 용서를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