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기자 hansu@chosun.com 입력 : 2003.12.16 17:34 / 수정 : 2003.12.17 10:24
열반에 든 서옹스님.
불교 조계종 종정을 역임한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서옹 스님이 열반에 든 다음날인 14일, 조계종 총무원은 분주했다. 이날 오전 스님의 ‘열반송(涅槃訟)’을 언론에 발표했던 총무원은 오후 3시30분쯤, 오전에 발표한 ‘雲門日永無人至(운문에 해는 긴데 이르는 사람 없고)’로 시작하는 열반송 대신에 ‘臨濟一喝失正眼(임제의 한 할은 정안을 잃어버리고)’로 시작하는 새로운 열반송을 ‘공식’ 발표했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선승들에게 열반송은 처음 깨달음을 얻었을 때 터져나오는 ‘오도송(悟道訟)’과 더불어 수좌(참선하는 스님)로서의 일생에 가장 중요한 시작과 끝이다. 열반송은 큰스님들이 열반(涅槃·번뇌의 불을 끈 상태)에 들기 전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총체적으로 담아 직접 한시(漢詩) 등의 형태로 남긴다. 제자들이 받아 적기도 하고, 큰스님이 직접 친필로 남기기도 한다.
성철 스님은 지난 93년 입적할 때 미리 16절지에 펜으로 써 놓았던 열반송을 제자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이때 스님이 남긴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뱉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는 열반송은 스님의 종정 취임 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와 함께 유명하다.
이번 서옹 스님의 경우, 먼저 발표된 열반송은 스님이 임종 당일에 남긴 게송이며, 오후에 공식발표된 열반송은 스님이 최근 위독했을 때 미리 친필로 써놓았던 것. 제자들은 상의 끝에 친필본을 공식 열반송으로 발표했다.
서암 스님, 월하 스님, 서옹 스님, 고송 스님, 청화 스님, 덕명 스님, 덕암 스님, 정대 스님 등이 입적, 한국 현대불교사에 기록될 만큼 큰스님들이 잇따라 열반에 든 올해 국민들은 유달리 많은 열반송을 통해 고승들 도(道)의 경지를 엿볼 수 있었다. ‘좌탈입망’(坐脫立亡·가부좌를 하고 앉은 채 열반에 이름) ‘장좌불와’(長坐不臥·오랫동안 눕지 않고 앉아서 수도함) ‘일일일식’(一日一食·하루 한 끼만 먹음) 등 불가 수행의 신화를 보여주는 사자성어들도 많이 접했다.
“한 물건이 이 육신을 벗어나니/ 두두물물이 법신을 나투네/ 가고 머묾을 논하지 말라/ 곳곳이 나의 집이니라.”(월하 스님)
“이 세상 저 세상/ 오고감을 상관치 않으나/ 은혜 입은 것이 대천계만큼 큰데/ 은혜를 갚는 것은 작은 시내 같음을 한스러워할 뿐이네.”(청화 스님)
“올 때도 죽음의 관문에 들어오지 않았고/ 갈 때도 죽음의 관문을 벗어나지 않았도다/ 천지는 꿈꾸는 집이니/ 우리 모두 꿈 속의 사람임을 깨달으라.”(정대 스님)
서암 스님은 “달리 할 말이 없다. 정 누가 물으면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는 열반송을 남겼다.
한 스님은 “큰스님들은 평생을 수행하신 분들이기 때문에 생과 사를 가르는 순간도 범인들과 다른 것”이라며 “그러나 스님의 열반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될 뿐 지나치게 신비화하는 것은 누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월호 스님은“죽음을 두려워만 하지 말고, ‘바로 지금 여기’를 선물로 생각하고 최대한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불교적 관점에서 보면, 해탈해서 윤회의 고리를 벗어나기 전까지는 삶과 죽음은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이어달리기입니다. 잘 사는 만큼, 잘 죽는 것도 중요한 것이지요.”
쌍계사 승가대학 교수인 월호 스님이 불교적 관점의 ‘웰다잉(well-dying)’문제를 다룬 ‘언젠가 이 세상에 없을 당신을 사랑합니다’(마음의숲 출판사)를 펴냈다. 왜 ‘웰다잉’인가? 그는 “누구나 생사(生死)의 문제가 가장 큰 것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스님의 출가동기도 죽음과 관련이 깊다. 불교신자 집안 출신인 그는 공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에 다니던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그러나 매우 가까운 인연이었던 두 사람의 죽음을 잇달아 겪고 나서 생사(生死)에 얽힌 의문을 품었다. 동국대 선학과 대학원까지 마치고도 의문이 풀리지 않아 뒤늦게 출가했다.
‘삶과 죽음의 이어달리기’라는 표현처럼 월호 스님이 이 책에서 말하는 ‘웰다잉’ 방법은 역으로 ‘잘 살기’이다. 그는 “‘바로 지금 여기’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라며 “언젠가 우리 모두는 죽지만 두려워하기보다는 지금을 더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불교에서는 결정된 내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하는 행동이 나를 결정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매 순간 완전연소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몸의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입니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동안 열심히 사랑하고, 베풀고, 공부하고, 복덕(福德)을 쌓아야 합니다.” 그렇게 완전연소한 삶을 산 분이 바로 부처님이란 이야기다. 월호 스님은 “잘 사는 방법을 익혀 언젠가 찾아올 죽음을 잘 맞이하자”고 말했다.
삼보(三寶 triranta)
깨달음을 얻은 사람과 그 가르침 및 그 가르침을 따르는 교단 등, 이 세 가지를 보물에 비유한 말이다. 삼보에는 현전(現前) ·주지(主持) ·일체(一體)의 3종이 있다.
① 현전삼보는 석가모니 재세시에 현전해 있던 삼보로 별체삼보(別體三寶)라고도 하는데, 화의(化儀)삼보 ·이체(理體)삼보로 나누기도 한다. 그 중 화의삼보는 소승불교의 설로서 불보는 석가모니불, 법보는 불타의 설법과 계율, 승보는 불제자들을 가리킨다. 원시경전에서 불보를 십호구족(十號具足)의 여래(如來), 법보를 항상 선하며 보편타당성이 있는 여실(如實)한 교법(敎法), 승보를 세상사람들을 지도 ·교화하는 성제자들이라고 설하고 있는 것은 화의삼보에 해당한다. 한편, 이체삼보는 대승불교의 설로서 화의삼보의 진리 그 자체로서의 덕을 가리키며, 불보는 오분법신(五分法身), 법보는 멸제무위(滅諦無爲), 승보는 유학무학(有學無學:소승의 성자들)의 덕을 말한다. ② 주지삼보는 불교가 불멸(佛滅) 이후의 시대에 주지 ·존속하는 경우의 삼보를 가리킨다. 불보는 금속 ·목석 등에 의하여 조각된 불상, 그림 ·자수 등으로 그려진 불상으로 불교도의 예배의 대상이 된다. 법보는 황권적축(黃卷赤軸)의 경전으로 경(經) ·율(律) ·논(論)의 삼장(三藏)을 가리킨다. 승보는 체발염의(剃髮染衣)의 화합승(和合僧)으로서의 승단으로, 민중의 신앙을 지도하고 불교를 전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③ 일체삼보는 삼보가 진여(眞如)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을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보는 것이다. 또한 이 진여는 우리의 마음속에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마음과 일체라는 의미도 있다. 불타의 자각(自覺) ·각타(覺他)에서의 깨달음의 본질은 진여이기 때문에 불보이며, 교법의 청정한 규범은 진여이기 때문에 법보이며, 승단(僧壇)의 원융화합(圓融和合)은 진여이기 때문에 승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