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다듬어지는 겨레 문화
다듬어지는 겨레 문화
삼국시대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당연히 삼국시대의
임금(임검, 사람을 뜻하는 임과 신을 뜻하는 검의 합성어)일 것이다. 비록
독재적인 권력을 누리지는 않았지만, 임금은 각 국가의 최고권력자임과 아울러
그 국가를 상징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국의 임금이야말로 앞서 살펴본 제사의식의 최고 책임자이자 여러
제사장들의 대표였다. 그는 하늘을 숭배하는 국가적 의식을 주관함으로써
조상신의 대표 후예임을 분명히 했다. "삼국사기"에서 확인되듯, 그는
오행사상에 따라 정치제도를 만들고 통치를 하는 등 오행사상의 신봉자 또는
집행자이기도 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기자계의 이주 이후
형성된 지식인적인 문화와 기존의 제사장적인 문화가 통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삼국시대에 이르러 이 두 갈래의 입장이 통합됨으로써 우리 겨레의
'알'이 문화적으로 한층 무르익고 있었던 것이다.
고조선의 정통 후계자들이 마치 종교인과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오행사상의 계승자들은 철학자를 닮은 듯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 두 관점이 통합되지 않을 때, '정교일치'는 실제로 신앙이
지배하는 정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두 관점이 통합될 때, 정교일치는
신앙과 철학적 이론이 함께 지배하는 정치가 된다. 즉 두 관점이 통합되면
정치의 내용이 질적으로 성숙됨과 아울러 사회가 질적으로 발전하며, 문화
또한 질적으로 한 단계 올라서는 셈이다.
중국에서도 정치와 문화가 질적으로 발전하는 데는 제사장적 권위와 맞서는
학문(철학)적 요인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 기마종족이 남겨놓은 오행사상을
습득한 '유'라고 부르는 계층이 바로 그런 요인을 제공하고 있었다. 예컨대
공자라는 위대한 지성인도 그런 사람으로서, 제사장적인 전통과 지식인적인
요인의 융합을 주장한 위대한 선각자였다. 실제로 그가 남긴 역사서와
철학서는 그런 융합의 입장을 서술한 선구자의 유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오행사상은 우리 역상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회적 변화를 몰고 왔다. 따라서
오행사상이라는 지식인적 요소와 하늘숭배라는 제사장적 전통이 통합되는
삼국시대는 문화적으로 매우 발전된 시대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고구려의
경우 경당이라는 교육기관이 있었고, 신라의 경우 화랑이라는 교육조직이
있었는데 이들의 교육내용 또한 그런 통합사상을 기반으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삼국시대 초기는 기마종족적 문명이 체계화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삼국시대에 들어서 통합된 기마종족의 정신세계는 제사장적 전통이
오행사상가적 전통을 포용하는 것으로 현실화되었는데, 제사장적 전통은
통합의 정신적 방향이 되었고 오행사상가적 전통은 통합의 실용적 근거가
되었다.
아울러 고대국가라는 보다 폭 넓은 국가체계도 통합의 중요한 조건이
되었다. 요컨대 고대국가의 임금과 귀족들은 자신의 권위를 보장받기 위해
한편 제사장적 전통을 이용했지만, 더욱 복잡해진 현실적인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 다른 한편 실용적 지식을 활용했던 것이다. 삼국시대는 이 두 부류의
지적 전통이 공존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제공한 최초의 시대였던 셈이다.
그러나 문화적 통합과 비례하는 현실적 통합국가는 쉽게 세워지지 않았다.
세 나라의 경쟁관계는 너무나도 균형 잡힌 것이어서 어느 누구도 특별히
앞서가지 못했던 탓이다. 일반적으로 문화가 한 단계 발전하고 문화의 내용이
통합을 추구할 경우 거기에 걸맞은 정치적 실체가 등장하게 마련이지만,
삼국시대는 그런 일반론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은 시대였다. '삼국시대는 세계
역사에서 가장 긴 안정된 분열의 시대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