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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삼국시대는 반환점

이슬 (새벽이슬, 이슬의꿈,이슬과길) 2011. 3. 30. 14:21

삼국시대는 반환점

 

 

  열국시대가 고조선의 해체와 함께 이루어진 분열기였다면, 삼국시대는
분열에서 다시 통합을 이루어가는 반환점이었다. 삼국 가운데 신라가 이러한
특징을 가장 잘 보여준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가 세워지기 전에 6부촌이 있었는데,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들은 미리 이주해온 가자계의 정착민들과 토착민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 이주해온 세력을 받아들이고 그 지도자였던 혁거세를
중심으로 신라를 세웠는데, 이 과정이 신화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새로
추대한 지도자의 호칭이 거서간이고 그것이 진한 사람들의 용어라고 했으므로,
진한인들 또한 신라라는 나라에 참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 38 년조에도 진한인들이 신라의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즉 "중국에서 살던 사람들(중국지인이라고
하였고 중국인이라고 중국인이라고 하지 않았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이
진나라의 건국으로 살기가 어려워 동쪽으로 건너왔는데, 대부분 마한 땅
동쪽에서 살며 진한인들과 섞여서 번성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는 건국과 함께 이미 세 갈래 이상의 종족이 연맹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초기 정착자인 6부촌 계열과 중국계 기마종족의
이주자(진한인) 및 지도자로 추대된 혁거세 계열을 제외한 이들은 모두
기마종족으로서 일찍이 고조선의 구성원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라는 또 다른 이주집단인 석탈해계를 받아들였고, 뒤에 다시
북부여계의 이주집단인 김알지계를 받아들였으며, 뒷날 가야계까지 받아들여
여러 갈래의 종족이 공존하는 연맹국가를 발전시켰다. 즉 신라는 초기부터 그
이전의 다른 독립국과 달리 분열을 마무리하고 통합을 지향하는 성격을 띠었던
셈이다.
  그런 성격은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확인된다. 고구려 내부의 5부족은
처음부터 고구려가 연맹국가로 출발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또 고구려는 건국
이후 왕성한 정복사업을 벌임으로써 종족통합을 시도했는데, 옥저나 동부여 및
낙랑 등이 모두 무력에 의해 통합된 나라였다.
  백제의 경우 비류와 온조를 각각 지도자로 하던 초기의 두 세력이 점차
통합되었으며, 나아가 마한까지 통합함으로써 서서히 큰 국가로 발돋움해갔다.
또 백제는 강력한 해상주도권을 가지고 중국 대륙의 해안지역과 일본 열도의
주민들까지 통합해나갔다.
  이처럼 삼국의 건국 시기는 각 나라의 독특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계
가마종족의 해체,분열기를 통합기로 전환시키는 반환점, 곧 열국시대의
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문화적 내용이 결국 통합의 범위와
성격을 결정짓는 요인들을 만들고 있었던 셈이다. 실제로 삼국 이후의 역사는
삼국의 사상과 문화라는 압축 프로그램이 풀려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삼국의 분열기간이 너무 길었던 데서 비롯된다. 무려 7백여
년이 넘어도 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 기나긴 세월은 통합의 근본 범위가
흔들리고, 통합의 방향이 비뚤어지며, 통합의 성격이 변질될 수도 있는 그런
과정이었다. 즉 분열이 굳어지고 전통이 위협받기에 충분한 세월이 지루하게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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