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고집멸도”
고집멸도”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어느 날 악마가 사람들을 잡아와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너희들은 오래 동안 이 감옥에서 괴로움을 경험하면서 고통스럽게 지내야 한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악마도 죽었고 감옥도 무너졌고 사람들도 죽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악마가 또 사람들을 잡아와서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너희들은 오래 동안 이 감옥에서 괴로워하며 지내야 한다.” 그러던 어느 따뜻한 오후였습니다. 감옥에 한 사람이 모처럼 스며든 햇볕을 쬐며 잠시 고통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감옥 바닥에서 글 조각 하나가 씌어져 있는 것을 보고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고집멸도” 햇볕을 쬐던 그도 그 소리를 들었고, 이름을 처이라고 했습니다. 처이도 “고집멸도”를 되뇌었습니다. “고집멸도” 어느 날 비가 내렸습니다. 처이가 세상에 있을 때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서 비가 내릴 때면 늘 생각나던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할 일을 다 마친 사람은 비가 내려도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고, 할 일을 덜 마친 사람은 비가 내리면 마당에 널려 있는 덜 말린 곡식을 덮거나 치워야 하니 쉴 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처이가 악마의 감옥에 붙잡혀 있으면서 오늘 이렇게 비를 보게 되니 세속에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이 참으로 후회스럽고 원통하게 여겨졌습니다. “고집멸도”, 처이가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습니다. 그 때 함께 있던 사람 중에서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고집멸도란 부처님이 가르치신 사성제인데, 괴로움, 괴로움의 모임, 괴로움의 멸함, 괴로움의 멸함에 이르는 길, 이것을 말합니다.” 처이는 이 말을 외웠습니다. ‘괴로움, 괴로움의 모임, 괴로움의 멸함, 괴로움의 멸함에 이르는 길’을 외우고 또 외웠습니다. 악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 것, 이것이 처이에게는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까닭인지 바로 그날부터 악마가 감옥을 최신식으로 바꾸어 놓더니만 갖가지 즐거움을 함께 넣어주었습니다. 텔레비전, 라디오, 컴퓨터 등을 누구나 사용할 수 있도록 충분히 넣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괴로움을 외우던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처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처이도 그만 괴로움을 잊어버리고 감각적 즐거움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면서도 문득문득 괴로움을 알아야겠다는 의욕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악마 나라에서 흉년이 들어 며칠씩 굶는 일이 자주 생겼습니다. 처이도 밥을 제대로 못 먹어서 배가 고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루 햇볕이 따뜻하게 감옥을 한번 비추어주었습니다. 그래서 처이는 따뜻한 햇볕을 쬐며 비고픔을 잊고 잠시 쉬었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세속에서 사랑하던 여인과 즐겁게 이야기하던 그런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그 떠오른 생각이 멈추지 않고 계속 일어났습니다. 처이는 계속 그 생각에 빠져 세속의 여인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 때 갑자기 누군가가 “야, 밥이 나왔다.”라고 말했고, 처이도 밥을 보고 세속의 여인 생각에서 벗어나서 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모두 잠들었습니다. 처이는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낮에 생각난 세속의 여인 때문인지도 몰랐습니다. 잠이 오지 않자 처이는 일어나 “고집멸도”를 생각했습니다. ‘처음에 마음속에 세속의 여인이 생각났다. 그것이 괴로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자로 고(苦)란 식물 같은 것이 오래되는 것이니, 마음속에 일어나는 세속의 추억도 저 식물이 오래되면 고(苦)의 특성을 보여주듯이 그렇게 고(苦)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 몸도 저 식물이 오래되면 보여주는 특성을 보여줄 것이고,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느낌, 생각, 지어감, 식(識)도 저 식물이 오래되면 보여주는 그런 특성을 보여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저 식물이 오래되어 보여주는 특성이란 무엇인지 처이는 생각했습니다. 저 식물이 오래되어 보여주는 특성은 바로 시들어버린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들어버린다는 것’, 이것이 한자의 고(苦)가 갖는 의미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고(苦)는 ‘쓸 고’라고 훈음하니까 맛이 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처이는 우선 ‘괴로움은 시들어버리는 것이고 쓴 것’이라고 정리해 놓았습니다. 다음으로 처이는 괴로움의 모임을 생각했습니다. 한자로 집(集)은 ‘모을 집’이라고 훈음하는데, 그것은 작은 새들이 나무에 모여 있는 것을 말한다고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괴로움의 모임이란 바로 자신에게 일어난 생각이 모이고 또 모이고 자꾸 모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처이는 생각했습니다. 한번 일어난 생각을 붙잡아서 또 생각을 하면 그것은 한번 모인 것이 되고 또 생각하면 두 번 모인 것이 되고 또 생각하면 세 번 모인 것이 되고, 그렇게 끝없이 모이는 것이 괴로움의 모임이라고 처이는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느낌이 일어났을 때 또 느끼면 느낌이 두 번 모인 것이고, 세 번 느끼면 세 번 모인 것이 될 것이라고 처이는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괴로움의 멸함이란 무엇인지 처이는 계속 생각해나갔습니다. 아까 세속의 여인을 생각하다가 밥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언제 그랬다는 듯이 세속의 여인에 대한 생각은 까마득이 잊어버리고 밥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여기에서 추론해보면 괴로움의 멸함이란 괴로움을 생각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하면 괴로움의 모임을 안 만들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 그것으로 마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지 말아서 괴로움의 모임을 안 만들면 되고, 느낌이 일어날 때 또 느끼고 또 느끼려고 하지 말고 느낌의 모임을 안 만들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괴로움의 모임을 안 만들면 처음에 일어났던 괴로움은 이제 사라졌을 것이니 그것이 바로 괴로움의 멸함이라고 처이는 생각했습니다. 일어난 생각에 대해서 괴로움을 생각했고, 괴로움의 모임을 생각했고, 괴로움의 멸함을 추론했으니 이제 괴로움의 멸함에 이르는 길을 생각해 볼 차례였습니다. 괴로움을 멸하는 방법이란 괴로움이 일어날 때 그것이 괴로움인줄을 알아서 괴로움이 안 모이게 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무엇이 일어날 때 그것이 괴로움이고 그것이 괴로움의 모임으로 안 모이도록 할 것인가 하면 바로 정견 이하 정정으로 계속 닦아 가면 될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무엇이 일어날 때 마다 ‘이것은 괴로움이다, 그러니 괴로움이 모이게 하지 말자.’라는 쪽으로 마음이 쏠릴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느낌이 일어나면 ‘이것은 괴로움이다, 기뻐하지도 말자, 즐거워하지도 말자.’하면서 괴로움이 안 모이도록 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이제 처이는 “고집멸도”에 대해서 하나의 뜻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처이는 시간이 날 때마다 “고집멸도”의 이 한 가지 뜻을 계속 익히고 또 익혀나가기로 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