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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 이스라엘 민족과 우리 민족과의 공통점....이라...(어이없군...)

이슬 (새벽이슬, 이슬의꿈,이슬과길) 2011. 3. 30. 11:42

성경 상으로 우리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은 생활 습관과 공통점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도표」를 참고하기 바란다.

 

공통점이 무려 150여 가지가 있지만 55가지를 찾아보았다. 우리 민족을 제2의 이스라엘 민족이라고 말을 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사실은 이스라엘 원족이 바로 우리 한민족인 것이다. (이동경로로 보면 레바논 동쪽 소라 → 시리아 나라 → 이락(이라크) → 이란 → 중국 알타이 산맥에서 정착 → 만주 → 한반도로 들어옴)

 

우리민족을 한반도에 정착하게 한 것에는 하나님이 깊은 섭리가 있는 것이다.

 

우리민족과 이스라엘민족은 생활습관이 같다.

(1) 지리적 조건이 강대국 틈에 끼어 있다.

(2) 족보를 가진 민족

(3)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같은 전설이 많다.

(4) 팥죽(유월절 행사, 이사할 때 문설주에 바르는 풍습)

(5) 산당과 성황당 (빨강 헝겊을 나무에 매달아 귀신이 접근하지 못하게 함, 양의 피 상징)

(6) 소와 양의 제물

(7) 맹세하는 풍속

(8) 폐백드리는 풍속(신랑 측에서 처가에 신부를 데리고 오는 대가로 치르는 비단과 옷감)

(9) 놋뱀을 장대 끝에 달았다. 솟대를 동네입구에 세웠다.

(10) 사사제도와 두민제도가 같다.

(11) 제사장이 결례를 행함과 제관의 결례가 같다.

(12) 이장법이 같다.

(13) 종의 제도가 같다.

(14) 청색, 홍색 실이 같다.

(15) 세마포와 제사장의 옷이 도포와 같다.

(16) 상복의 베옷이 같다.

(17) 수놓아 만든 흉패와 관복이 같다.

(18) 감함기름과 산초기름이 같다.

(19) 등불과 청사초롱으로 신랑을 맞이하는 것이 같다.

(20) 고운밀가루 전병의 소제와 3복의 전병이 같다.

(21) 제기, 등잔 등이 같다.

(22) 문설주와 대문에 성구 써 붙이는 것이 같다.

(23) 이마와 손목에 쓰는 것과 복건 돌피가 같다.

(24) 어릴 때 성구 암송과 동문선습계몽편 외는 것이 같다.

(25) 먹는 것과 목 먹는 것도 같다.

(26) 고난의 떡과 쓴 나물, 보름에 먹는 나물이 같다.

(27) 삼차 절기 지키는 것이 같다. (설, 추석, 상달)

(28) 사생자(서자), 창기 천시가 같다.

(29) 품삯 주는 법이 같다.

(30) 태형이 같다.

(31) 계대 양자법이 같다.

(32) 삼대에 숨기는 것이 같다.

(33) 자녀 축복이 같다.

(34) 맷돌이 같다.

(35) 도장, 끈, 지팡이가 같다.

(36) 돌팔매질이 같다.

(37) 챵애가 같다.

(38) 기도 방법이 같다.

(39) 시편이 같다.

(40) 춤추는 것이 같다.

(41) 시체의 향유와 향물을 씻는 것이 같다. (베틀)

(42) 전쟁도구와 전쟁방법이 같다.

(43) 화장법과 장신구가 같다.

(44) 생남 8일 할례와 3이레 비는 것이 같다.

(45) 3신이 같다.

(46) 결례법이 같다.

(47) 단일민족임이 같다.

(48) 약소민족이 같다.

(49) 같은 셈족이다.

(50) 산에서 일 이루어진 것이 같다.

(51) 하나님을 부르는 민족이다.

(52) 흰옷을 즐겨 입는 민족임이 같다.

(53) 레위기를 가진 민족과 예의지국이 같다.

(54) 아브람과 단군이 단을 쌓고 하나님께 제사지냄이 같다.

 

문 답 식 문제

문 : 단자손은 지금부터 몇 년 전에 대동강변에 고조선을 설립했나?

답 : 약 3천 3백년 전입니다.

문 : 우리 민족과 이스라엘 민족은 생활 습관이 150가지가 같은데 5가지만 말하여라?

답 : 1. 흰옷입는 것이 같다.

2. 베옷입고 곡하는 것이 같다.(곡하는 소리도 같다. ‘아이고, 아이고~)

3. 산소마다 돌제단을 쌓는 것이 같다.

4. 물동이를 머리에 이는 것이 같다.

5. 유월절행사, 팥죽을 해서 문설주에 바르는 것이 같다.

문 : 이스라엘 땅에서 이동한 경로를 말하라.

답 : 이스라엘 → 가나안 소라 → 시리아 → 이락 → 이란 → 중국북부

알타이 산맥 → 만주 → 압록강 건너 → 대동강변에 고조선 설립

사사기 19장』 주인공 레위인 제사장의 비밀코드 | 역사◎종교◎철학 2006/07/30 02:55

http://blog.naver.com/pts9228/60026871967

 

 

사사기 19장

이스라엘에 왕이 없는 사사 시대가 있었습니다. BC 12~11세기에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분배 받은 가나안 땅에서 각기 지파대로 적당한 영토에 살았으며, 각각 다른 사정 아래서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중앙집권적인 기관이 없었고 왕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민족 전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공동의 지도자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 지도자의 소임을 맡은 사람이 사사입니다.

 

사사는 타민족으로부터 압박을 받거나 전쟁을 할 때에는 군사령관이기도 하였고, 평상시에는 판사의 역을 담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의 권능은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으로서, ‘신(神)의 심판’을 대행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야기하는 시대적 배경은 천하장사 삼손이 미인계에 속아 잠복해 있던 블레셋 군인에게 붙잡혀 두 눈이 뽑히고 결국 사당에 끌려가 사당 기둥 두 개를 뽑아버리고 결국 지붕이 무너져 블레셋 고관 장수들과 더불어 장렬한 최후를 맞자, 삼손 장수를 잃은 단지파가 동북쪽으로 사라지는 때입니다. 삼손은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단지파에 속한 사람으로, 레위사람 고라 자손의 사무엘과 동시대에 살았습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였지만 그가 죽자 선지자 사무엘이 마지막 사사가 됩니다. 사무엘이 마지막 사사라고 한 것은, 사무엘이 베냐민 지파의 사울을 기름부음으로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사사가 이어질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사사시대에서 통일왕국이 성립되는 과도기에 일어난 사건 중 하나로 베냐민 지파를 몰살시키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있었습니다. 베냐민 지파의 몰살 사건은 성경 사사기 19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19장 본문의 주인공은 에브라임 산지 구석에 살던 레위인이었습니다. '에브라임 산지 구석'은 에브라임 산지의 북쪽 끝 실로 근처를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실로(Shiloh: 평화를 주는 자 또는 의로운 메시아라는 뜻)는 여호수아 때부터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언약궤와 성막이 있던 곳입니다. 그곳은 여호와의 집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중요한 예배 중심지였습니다.

 

여호와의 집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이 남쪽 30km 아래에 있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첩을 취하여 데리고 와서 살았습니다. 그 첩은 창기와 같은 직업적인 음행을 한 후에 자기 남편을 떠나 친정으로 가버렸습니다. 그 당시에 간음죄를 지으면 돌로 쳐서 죽이게 되어 있습니다(레 20:10). 더구나 여호와의 집에서 봉사하는 모든 레위인은 기생이나 부정한 여인을 취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레2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레위인이 이 같은 여인을 첩으로 맞은 것은 당시의 성직자들이 윤리적으로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히브리 성경을 보면, 이 레위인은 부정한 여인을 첩으로 데리고 오기 전부터 음행에 중독된 제사장인 것 같습니다. 남편의 음행에 덩달아 부정한 여인도 다른 남자와 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보다 첩이 음행에 있어서 한 수 위이기에 남편은 짜증을 부리고 홀대하게 되니 첩은 견디다 못해 불만을 품고 친정집으로 가버렸습니다.

 

원래 음행에 중독된 자는 분노와 살인 그리로 음흉한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에는 이 레위인이 사라진 첩을 연모하였다고 하나, 사실은 눈이 뒤집힌 상태의 분노상태에서 첩이 도망가서 숨어 있을 만한 곳을 미친 듯이 찾았던 것입니다. 짐작대로 친정집에 있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사라진 지 4개월만입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이 음란하고 교활한 레위인 제사장은 교활한 계책(計策)을 세웁니다.

 

먼저 그녀를 도로 데리고 오기 위해서는 그녀와 그녀의 장인을 안심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레위인은 하인 하나와 나귀 두 필을 끌고 유다 베들레헴에 있는 첩장인의 집으로 갔습니다. 첩의 장인 집에 도착하여 나귀 두 필에서 풀어놓은 어마어마한 선물공세에 첩장인의 입이 찢어질듯 좋아하면서 레위인을 맞이했습니다. 사위의 꾐에 넘어간 것도 모르고 장인은 연일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사위는 그녀를 하루속히 데리고 나와 갈기갈기 찢어죽이고 싶은 마음뿐인 고로, 그녀를 바로 데리고 가려고 했습니다.

 

사위의 속내를 모르는 장인은 계속 유숙하면서 딸과 사위가 한방에서 지내는 것을 좋아하고 또 사위의 다리 기운이 빠질까봐 떡도 바치면서 사흘 동안 레위인을 머물게 하였습니다. 첩장인의 집은 연일잔치를 베풀 정도로 부자였고, 레위인이 빨리 떠나겠다는 것을 저지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할 정도로 베드레헴의 유다족속 중에 권세 있는 집안이었었던 겁니다. 그래서 레위인이 자신의 첩을 죽이더라고 직접 살해하지 않고 청부살인을 하는 주도면밀한 계획을 꾸몄던 것입니다.

 

처가댁에 머문 지 다섯 째 되는 날, 안장 지운 나귀에 첩을 태우고 레위인은 하인을 앞세워 떠났습니다. 여부스(예루살렘)에 가까웠을 때, 해가 지려하기에 하인이 주인에게 여기 성읍에서 유숙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레위인은 에브라임 산지의 노인을 매수하여 베들레헴에서 반나절 되는 지점에 있는 빈집을 얻어 대기하도록 했기 때문에, 베냐민 지파가 사는 기브아에 가서 유숙하자고 고집하였습니다. 기브아에 있는 인적이 드문 집을 구할 때에 베냐민 사람들에게 에브라임 산지의 사람이라는 것을 숨기고 베냐민 사람인 것처럼 속였던 것입니다.

 

기브아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해는 진 까닭에 성읍 거리에는 다니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밤이 깊어 모두 집에서 잠들었던 것입니다. 거리에서 잠시 쉬는 동안에 레위인은 첩과 하인에게 뒷간에서 잠시 볼일 보고 오겠다고 한 뒤, 얼른 노인이 있는 집에 달려가 저 번에 모의한 일들을 착수하라고 연락을 취하고 돌아옵니다.

 

노인은 해질 무렵도 한참 지난 오밤중에 밭에서 일하고 오는 것처럼 차림새를 하고 짐을 풀고 앉아서 쉬고 있는 그들 앞에 다가왔습니다. 이런 밤중에 노인이 나타난 것은 이상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나귀들에게 먹일 짚과 보리가 있고 나와 당신의 여종과 당신의 종 우리들과 함께한 소년의 먹을 양식과 포도주가 있어 무엇이든지 부족함이 없나이다’하는 노인의 환대에 더욱 더 어리둥절할 뿐이었습니다. 노인도 심히 가슴이 떨린 나머지, ‘그대는 안심하라 그대의 모든 쓸 것은 나의 담책이니 거리에서는 자지 말라’는 말을 쏟아냈지만, 아무도 그 말속에 흉계(凶計)가 있는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노인의 집에 들어갔지만 노인이 방금 말했던 노인과 함께 사는 장정(소년)들은 보이지 않고 조숙한 손녀 혼자만 있을 뿐입니다. 일행들은 피곤한 나머지 나귀에게 짚과 보리 먹이를 주고 자신들은 발을 씻고 곧 잠을 청하고 싶었지만, 오밤중에 노인이 주책도 없이 큰 상에 음식을 차려놓고 손님을 접대하겠다고 우깁니다. 이상하게도 일행 가운데 주인 되는 레위인은 이런 환대에 동조하며 기꺼이 따릅니다. 먹고 마실 즈음에 불량한 장정들이 그 집을 에워싸고 문을 부셔버릴 듯이 ‘꽝꽝’ 두드리면서 ‘네 집에 들어온 사람들 끌어내라’고 엄포를 놓습니다.

 

불량배들은 싱싱한 처녀와 레위인의 첩 둘 다 내어주겠다는 집주인의 제의를 거절합니다. 그러자 레위인이 자신의 첩을 불량한 장정에게 내어주려고 하니, 불량배는 순순히 응합니다. 첩은 그제야 자신이 남편에게 속은 것을 알고 나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남편의 힘센 양팔에 붙들려 저항도 제대로 못하고 바깥으로 내팽겨집니다.

 

원래 그녀는 음기가 강한 자인 고로 여러 장정이 돌아가면서 윤간을 해도 자지러져 죽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녀의 음행에 장정들이 당해내지 못할 것 인즉, 결국 그녀는 욕보임을 당한 후 목조임을 당하여 숨이 막혀 죽었던 것입니다. 레위인은 그 시체를 나귀에 싣고 에브라임 산지의 집으로 가서 첩의 시체를 칼로 난도질하여 열두 토막을 내어 이스라엘 사방에 퍼져 있는 각 지파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의 살인 교사에 동조한 노인은 집을 버리고 자신의 고향 에브라임 산지로 숨어들었습니다.

 

이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온 회중이 미스바에 모였습니다. 미스바는 베냐민 지파의 땅의 경내에 있는 곳으로 레위인의 첩이 죽은 기브아와 가까운 곳입니다. 베냐민의 사람들은 자신의 영역에 다른 지파의 군대들이 집결한 것을 보고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기브아의 베냐민 지파를 응징하기 위하여 모인 군사의 수가 40만이었다는 것은 출애굽시 장정의 수가 60만이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실로 엄청난 것입니다. 재판을 하여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 전에 먼저 대규모의 군사를 집결했다는 것은 사려 깊지 못한 행위였습니다. 죽은 첩의 남편이 레위인 제사장이라는 신분이라는 점과 첩의 아버지가 유다지파의 권문세족이라는 점에서 그들의 증언을 곧이 그대로 받아들인 각 지파의 지도자들은 사건의 겉모습에만 경악하고 신중하게 대처하지 못하였습니다.

 

총회는 기브아 불량배들의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서 첩을 잃은 레위인 제사장을 불러서 사건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듣기로 했지만, 이것은 유다지파와 에브라임지파에서 먼저 알고 있던 사실을 다른 지파 사람들에게 직접 듣게 함으로 오히려 더욱 이성을 마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총회 재판석에서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이 자기 목숨을 노렸다고 증언하고 자기가 첩을 그들에게 내어 준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죽은 첩의 아버지가 유다 베들레헴 사람으로서 자신의 딸이 틀림없다고 증언하니까 더 이상 다른 심문을 하지 않고 기브아의 불량배 베냐민 사람이 저지른 일로 속단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냐민 지파의 사람도 같이 총회에 참여시켜 변명할 기회를 주어야 평등한 재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베냐민 사람을 제외시켰다는 것은 이성보다 분노의 감정으로 사로잡힌 재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재판결과만 통보하여 베냐민 지파에게 레위인의 첩을 죽인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인도하라고 요청합니다. 베냐민의 지도자들은 황당한 일을 당한 것입니다. 불량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에, 베냐민 사람들은 이 사건을 전혀 알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미스바에 모인 총회에 ‘그런 불량배는 우리에게 없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베냐민 지파 쪽으로부터 이런 전갈을 받은 총회는 불량배들을 감싸고 오히려 죄를 옹호하는 것으로 크게 오해를 하고 맙니다. 그리하여 군사를 일으켜 기브아를 치기로 작정하고 총회를 위해 미스바에 모인 군대는 그대로 대기시키고, 제사장과 각 지파의 지도자는 미스바 북쪽 3km 지점에 있는 벧엘에 올라갔습니다. 벧엘은 BC13세기 초에 여호수아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성읍이 되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는 그 성읍을 베냐민 지파 자손의 기업으로 물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총회에 모였던 이스라엘 각 지파의 대표자들은 미스바 북쪽 10km 지점에 있는 실로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습니다. 실로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안치되어 있는 곳이며, 제사장이 언약궤 앞에 선다는 것은 하나님이 앞에 서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상달되는 실로를 제쳐놓고 제사장이 벧엘을 택한 것은 이번 사건의 주인공이 되는 레위인 제사장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것입니다. 심령을 관찰하는 여호와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첩의 살인을 교사한 레위인 제사장의 흉계를 알지 못하는 다른 제사장들은 벧엘에 올라가서 ‘우리 중에 누가 먼저 올라가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라고 하나님께 여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살해당한 여자의 아버지가 속한 유다 지파를 지명하면서, ‘유다 지파가 먼저 나가서 싸워라’하고 응답을 합니다. 그것은 베들레헴 유다 사람이 자신의 딸이 음행을 저질렀으면 돌로 해골을 까야 모세 율법에 합당하거늘 오히려 딸의 범죄를 감싸고 돈 것이 같은 이스라엘 족속끼리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몰아넣었기에 그 대가를 유다 지파의 족속들이 받으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리하여 기브아에서 베냐민 자손과 싸운 유다 지파의 군병들 이만 이천이 죽음으로서, 1차 전쟁은 이스라엘 총회의 패배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총회는 처음부터 여호와 하나님 앞에 묻기를, ‘진정 베냐민 자손들이 죄를 지었는가?’를 여쭈는 것이 온당했고 현명한 처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도 아닌 같은 동족과 싸우게 될 역사적인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같은 베냐민 자손의 죄 유무를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았다는 것은 마치 인간의 판단을 중시한 큰 과오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들은 1차 전쟁에서 패배를 맛보았으면 돌이켜 반성을 해야 할 것인데, 오히려 원망조로 울며불며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라고 여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철부지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에 그냥 근성으로 ‘올라가서 치라’고 할 뿐입니다. 결국 2차 전쟁도 어제 치른 패배와 같이 일만 팔천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총회는 두 번이나 연이은 패배에 대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깨달지 못합니다. 총회는 지금이라도 베냐민 지파의 사람들이 ‘애당초 여자를 윤간하여 죽인 그런 불량배는 우리에겐 없다’고 호소하던 일을 생각해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총회는 엉뚱하게도 이제는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 실로에 안치되어 있는 법궤를 하나님의 허락도 없이 벧엘에 옮겨놓는 가증한 일까지 마다하지 않습니다. 총회의 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은 출애급 당시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모세가 제작한 법궤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는 한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승리를 약속하는 언약궤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제 총회는 하나님보다 법계를 의존하였습니다.

 

하나님께는 베냐민 지파를 위해서 모든 이스라엘 족속을 멸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열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는 것처럼....... 결국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는 3차 전쟁에서는 아무리 용맹스런 베냐민 지파 사람들일지라도 이스라엘 각 지파가 연합된 40만 군사와 싸운다는 것은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베냐민 사람들은 몰살당하고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로 피한 600명만 겨우 살았습니다. - 끝 -

 

[후기]

사사기 19장의 주인공이 되는 에브라임 산지의 제사장 레위인이 어떤 사람인지 이름을 성경에 기록했다가 나중에 필사하던 자가 이름을 제한 것은 그 레위인을 잘 아는 사람들이 ‘그는 음행을 좋아하였고 또한 제사보다 제사장에게 바치는 제물에 관심을 더 두었노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레위인의 첩장인이 되는 유다 베들레헴의 사람의 이름을 성경기록에서 제한 것도 시중에 나도는 그 사람의 인물평이 나빴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세월이 흐르자, 제사장들은 그들 자신이 얼마나 잘못되게 속단하고 어리석은 판단에 의해서 저지러진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죄를 통감하고 벧엘로 옮겨온 여호와의 법궤를 다시 제자리로 옮겨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지 않고 인간의 뜻에 의해서 임의로 옮겨진 법궤는 얼마가지 못해 이방인의 손에 넘어가는 수난을 겪게 됩니다. 그 실로는 여호수아 때부터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법궤와 성막이 있었던 곳으로, 이스라엘의 백성들의 중요한 예배의 중심지였습니다.

 

BC 1075년에 실로와 성소는 파괴되고 맙니다. 그 해에 블레셋 족속에게 사로잡힌 이스라엘의 사사 삼손은 이방인의 사당에 제물로 받치는 것을 육감으로 알아차리고 다곤 신전의 기둥 두 개를 뽑아버리고 블레셋 고관 장수들과 함께 압사당합니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삼손의 비보를 접한 단지파 자손들은 블레셋 민족을 몰아낼 전의를 잃었습니다. 그래서 분배받은 가나안 땅을 차지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서 동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삼손이 죽자, 선지자 사무엘은 삼손을 이어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12지파 가운데 단지파 민족들만 가나안 땅에서 빼어낸 것은 그 땅이 피로 얼룩졌고 제사장과 이스라엘의 음행으로 더 이상 축복의 땅이라고 할 수 없는, 오직 전쟁만 끊임없이 일어날 땅이라는 것을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21세기 현세에 사는 사람들도 판단하기에 그 가나안 땅이 지금에 팔레스타인이라는 곳인데 과연 하나님께서 예비한 복된 땅이라는 『가나안 복지』라고 단언할 자 있을 지, 아마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랄이가 났네

 

아스라하니 먼 옛날에 아리랑과 쓰리랑이란 종족들이 아랄 해 일대에서 살다가 동쪽으로 수만리 떨어진 한반도로 이동했다면, 그들의 일부는 아랄의 서쪽과 남쪽으로도 이동했을 것이다.

 

그곳에는, 한국에 아리랑이 있듯이, 그들의 이동을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인 자취들이 있을 것이다. 그 자취들을 찾아서 그것들을 한국의 신화와 역사에 접합시켜 보면, 아리랑과 쓰리랑의 실체와 잊혀진 역사를 밝힐 수가 있을 것이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랄이가 났네."가 역사적 사실이라면 길이 있을 것이다.

 

'아리랑'·'아리안(Aryan)', '쓰리랑'·'수메리안(Sumerian)' 소리가 비슷하다. 아리안은 인도유럽 어족의 언어들을 파종한 종족이고, 수메리안은 메소포타미아에서 수메르 문명을 탄생시킨 종족이다. 이 4종족 사이에 어떤 역사적인 연관성이 있을까? 기존의 역사관으로 보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어이없는 발상이다. 더구나 '아리안'과 '수메리안'이란 이름들이 근대에 생겼다면, 망신을 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아리랑과 쓰리랑은 아랄에서 태어났다."가 역사적 사실이라면 사정은 달라진다. '아리안'과 '수메리안'이 근대에 생긴 이름들이라고 하더라도 '아리랑'은 '아리안', '쓰리랑'은 '수메리안'과 기원이 같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 하면, 옛날부터 많은 종족들이 있었지만 종족의 이름들이 이렇게 쌍을 이루고 유사할 확률은 매우 희박하고, 그런 전례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유사성이 생긴 까닭은

'아리안'과 '수메리안'이 역사 용어로 처음 사용될 때, 역사

적 근거가 있는 어휘들 중에서 선택되었고,

그 어휘들이 '아리랑'·'쓰리랑'과 기원이 같았기 때문

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책의 이야기는 중심을 잃고 벌써 중단되었을 것이고,

앞으로 더 이상 써 나갈 수도 없을 것이다.

 

'아리랑'은 '아리안'과 같고 '쓰리랑'은 '수메리안'과 같다면,

두 종족은 인원수가 매우 많았고,

이동 규모와 범위가 대단히 크고 넓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의 자취가 어떤 형태로든

세계의 고대사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아리아 인(Aryan)이란 종족이 기원전 2000년경부터

유럽과 인도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인도유럽

어족의 여러 언어들이 생겼다는 설이 나온 지는 200여 년 되었다.

그러나 이 설은 아리아 인의 원주지가 밝혀지지 않아

정설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지 못하고 있다. (주 1-4)

 

수메르 인(Sumerian)이란 종족이 고대에 존재했었고, 그들이 기원전 3200년경부터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고대 문명을 탄생시켰다는 사실이 알려진 지는 100여 년 되었다. 수메르 인은 메소포타미아로 이주한 동양계 종족으로 밝혀졌지만, 그들의 원주지가 어디였는지는 캄캄한 수수께끼다.

수메르 인과 아리아 인의 탄생

 

홍수 시대에 이곳으로 모여든 종족들이 동방계와 서방계로 양분되어 공존 대립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랄이가 났네."이다. 이 노래에는 아리랑과 쓰리랑은 다 같이 아랄에서 태어났으니 서로 싸우지 말고 화목하게 잘 지내자는 뜻이 담겨있다.

 

아랄 지역에서 상호 대립한 두 종족이 있었다면, 아무 다리아 강 출신과 시르 다리아 강 출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종족이 같은 지역에서 이주해 왔으면서도 오래도록 대립했다는 것은 출신 지역의 강이 달라서만이 아니라, 인종과 언어에 차이가 있었다는 뜻이다.

 

서쪽에서 이주한 종족들은 아무 다리아 강을 중심으로 모여

하나의 언어권을 형성했다. 이들이

아리랑 즉 아리아 인이고, 이들의 언어가 아리아 어다.

 

동쪽에서 이주한 종족들은 시르 다리아 강을 중심으로 모여

하나의 언어권을 형성했다. 이들이

쓰리랑 즉 수메르 인이고, 이들의 언어가 수메르 어다.

 

아리아 인과 수메르 인은 각각 강 하나씩 차지하고 2천여 년 이상을 공존 대립하며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기간에 다양한 소집단들이 모여 거대 집단으로 성장하면서, 전체를 포용할 수 있는 우주론적 보편성에 기초한 새로운 종교와 철학이 형성됨으로써, 큰 집단에 어울리는 큰 집단을 위한 새로운 문명이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알알 문명의 종교와 철학은 그들이 이주지에 남긴 초기의 자료들을 종합하면 알 수 있다. 태고 시대의 이 문명을 '알알 문명'이라고 이름했다. (주 1-10)

 

'아랄(Aral)'은 무슨 뜻일까?

 

인류 문명의 발상지인 '아랄 해(Aral Sea)'의 '아랄'은 '알알'이 원형이다. '알알'의 '알'은 한국어의 '알'과 어원이 같다. 그래서 '알알'은 '알이 많다'는 뜻이다. 같은 말을 잇대어 사용해 뜻을 강조하거나 많음을 나타낸 어휘들이 옛 기록에 있다.

 

예를 들면, '같이같이'는 '언제나 같이'이고, '히고히고'는 '매우 희다'는 뜻이다. 옛날에 아랄 해 일대는 많은 새들의 산란지였기 때문에, 새들이 낳은 알이 많아, 알이 많다는 말인 아랄(알알)이 이 지역의 이름으로 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터키 어로 '아랄 해'의 '아랄'은 '섬이 많은'이라는 뜻이다.

아랄 해에 섬이 많아 '아랄'

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알이 많다'와 '섬이 많다'는

서로 다른 해석이지만, 둘은 기원이 같다.

 

아랄 해에는 1000여 개의 섬이 있었고 이 많은 섬에 새들이 낳은 알이 많았기 때문에, '알'하면 '섬'을 연상하게 되어, '알'이란 말에 '섬'이란 뜻이 생기면서, '아랄'은 '섬이 많은'이란 뜻으로도

쓰이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원래 터키 족은 내륙 초원 지대에서 살았었기 때문에 터키 어에 섬이라는 말이 없어 '아랄'을 '섬이 많은'이란 뜻의 어휘로 차용했다고 볼 수 있다.

 

'섬'이란 말이 '알'에서 기원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어휘들이 있다.

독일어로 섬이라는 말인'아일란트(Eiland)'는 독일어로 알이라는 말인 '아이(Ei)'와 땅이라는 말인 '란트(Land)'가 합쳐진 것이다. 그러므로 'Eiland'는 '알땅'이란 뜻이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Eiland'의 원 뜻이 '알땅·

계란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세계사가 알알 문명의 역사를 잃어버렸듯이 독일인들 역시 원래의 뜻을 잃어버리고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영어로 섬이라는 말인 '아일런드(island)'의 원 뜻도 '알땅'이라고 할 수 있다.

 

'알'은 한국어 '아기'·'아이'와 기원이 같다고 볼 수 있다. 영어로 알이란 말인 'egg'는 '아기', '아일랜드(Ireland)'의 '아이'는 '아이'와 어원이 같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일랜드(Ireland)'란 국명의 원 뜻은 '새로운 생명의 땅'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슬란드(Iceland)'의 원 뜻도 '새로운 생명의 땅'이라고 보아야 한다. 추운 나라여서 얼음 나라[Ice land]로 했다고 본다면 아리아 인의 이동 역사를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뜻이다.

 

'잉글랜드(England)'의 '잉글'은 '앵글로 색슨(Anglo-Saxon)'의

'앵글로(Anglo)'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렇다면'Angland'로 되지 않고 'England'로 되었을까? 영국의 전통이 국가의 명칭을 잘못 표기해 왔다면, 영국인들은 자존심이 상할 것이다. 'England'란 어휘 속에 영국다운 역사와 전통이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한다.

 

'잉글랜드'의 어원은 '에그랜드(Eggland)'이었다고 볼 수 있다.

초기에는 '에그랜드(Eggland)'란

말에 '알땅·위대한 땅·새로운 생명의 땅'이란 뜻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난생 신앙으로 인해 '알'·'에그(egg)'란 말이 '위대한'이란 뜻으로도 쓰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츰 과거를 잃어버리게 되면서,

'에그'라는 말에서 '위대한·새로운 생명(아기)'이라는 뜻은 잊혀지고,

세월이 갈수록 '계란'이란 뜻만 남게 되었다.

이로써 '에그랜드(Eggland)'는 '계란 땅'으로만

들리게 되어 영국인들은 수치심을 느끼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에그랜드(Eggland)'와 '앵그로

(Anglo)'를 결합시켜 '잉글랜드(England)'로 바꾼 것이다.

초기의 'E'자를 'A'자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고수함으로써,

잉글랜드는 잉글랜드답게 아랄의 전통을 이을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여러 정황을 참작하여 추리한 것이지만,

이것은 추리가 아니고 복고라고 해야 옳을것이다.

한국어의 '아름다운'과 '아스라한' 그리고 일본어로 새롭다는 뜻인 '아타라시(あたらしぃ)', 이 어휘들의 첫소리 '아'는 '아랄'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2002년 7월 오 광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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